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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下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7. 1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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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下


춘추 전국시대는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할 때에 굴원은 입조하여 처음에는 초 회왕楚懷王(BC 329~BC 299)과는 관계가 돈독하여 국사를 원만하게 도모하는 등 신임이 두터워 좌도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전국시대 군주들은 새로운 정치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필요하였다. 그 당시는 진秦, 초楚, 제齊 나라가 각각 강대국으로서 서로 중국을 통일하여 패자가 되려고 쟁투를 벌이는 때였다.


이러한 시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하기도 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도 한다.

통상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453라 하고, 기원전 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 개국이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 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한 패자覇者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을 이루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7대국으로 병합한다.


드라마속 초나라 근상

(출처 : 드라마속 초나라 근상)


이 세 나라 중 가장 강대국은 진秦이었다. 그런데 초나라에서는 제와 연합하여 진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굴원屈原, 진진陳軫, 소휴昭睢 등의 친제파親齊派와 이에 맞서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 영윤令尹인 자제自蘭 등은 진에 투항하여 진과 친하고자 하는 친진파親秦派 즉 양파兩派로 나누어졌다.


이렇게 국론이 분분하자 회왕의 총희寵姬인 정수鄭袖는 친진파親秦派에 합세하여 친진파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친진파는 모두 부패한 귀족들로서 그들은 일신의 향락만을 누리고 지위 권세만 견고히 하고자 하는 무리였다.


이에 진나라는 제나라를 공격하려 함에 굴원은 동쪽 제나라로 가서 동맹을 맺게 하자 진나라는 이를 꺼려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어 고관 대신들과 임금의 총희 정수에게까지 뇌물을 써서 굴원을 참소하게 했다.


장의張儀(?~BC 309) :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모사가謀事家. 소진蘇秦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초회왕과 정수

(출처 : 초회왕과 정수)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魏, 조趙, 한漢나라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 관계를 맺게 하였다. 이를 상세하면 기원전 313년 장의는 초楚나라를 찿아가 회왕懷王에게 제齊와 국교를 끊으면 진秦의 땅 600여 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진진陣軫이 그렇게 하면 진秦과 제齊가 연합하여 오히려 초楚가 몰린다며 반대를 하였지만, 회왕懷王은 욕심스레 장의를 믿고서,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제齊와의 동맹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교활한 장의張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화가 난 회왕懷王은 진진陳軫이 반대를 하였지만 진秦을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초楚의 국력은 급속하게 쇠락하여 결국은 망하고 만다.


회왕은 우둔한 임금으로 간신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굴원의 관직을 박탈하고 국가 대사에도 참여를 시키지 아니했다. 이렇게 되어 회왕 말기에 굴원은 북한漢北으로 추방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연들을 그는 애절한 시로 표현하고 있다.

 

내 수행과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방종하지 않으나, [余雖好修姱以鞿羈兮]

아침에 충언을 하였다가 저녁에 쫓겨났네. [謇朝誶而夕替]


더 자세하게 하면 이렇다.


고관 대부는 굴원과 동등한 지위였고,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는 용호쟁투의 사이였다. 이런 분위기에 그들은 항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굴원을 공격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을 하였다. 그런 만큼 그들은 굴원의 재능을 늘 시기했던 것이다.


초나라 정수 일러스트

(출처 : 초나라 정수 일러스트)


어느 날 굴원이 회왕으로부터 국가의 법령을 만들도록 지시를 받고 이를 이행하던 중, 상관 대부는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회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를 연유로 그를 회왕에게 참소하였다.

"굴원에게 법령을 만들게 하신 일은 모르는 자가 없는데,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원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여, 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회왕은 분노하여 굴원을 멀리하였고, 마침내는 북한으로 추방하여 버렸다.


후에 진의 속임으로 드디어 회왕은 진의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초나라 회왕

(출처 : 楚顷襄王)


초나라 경양왕

(출처 : 楚顷襄王)


굴원은 정견의 상치로 다시 참언讒言을 당하여 양쯔강 이남 소택지로 또다시 추방되었다. 비록 왕은 그를 등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척 왕을 사모하고 우수와 비애로 점철된 유랑생활을 하면서, 강호를 거닐 때마다 애타는 심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굴원은 본인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왕이 아첨하는 자만을 좋아하고 충신의 올바른 소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며, 간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여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굴원屈原은 우울하고 슬픔에 겨운 유배 생활 속에서 그 유명한 이소離騷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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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굴원의 애국과 시詩 세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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