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금관가야 건국과 생활 모습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0. 01:40
반응형

금관가야는 삼국지에 구야국狗邪國,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언급되며, 변진 12국에서 성장하였다.


서기 42년 9명의 추장이 백성들과 함께 구지봉에서 하늘이 내려준 황금알 6개를 맞이하고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 가운데 수로首露를 왕으로 모심으로써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을 세웠다.


이런 건국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가야 주요 나라들의 세력 범위가야 주요 나라들의 세력 범위


금관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3~4세기경에는 철 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과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들에서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의 수로왕이 동해안에 위치한 음즙벌국, 실질곡국의 영토 분쟁에도 개입했다는 설화가 실려있어, 한때 금관가야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원통모양 청동기, 가야원통모양 청동기, 가야


바람개비모양 방패꾸미개, 가야바람개비모양 방패꾸미개, 가야


화로모양그릇받침, 가야화로모양그릇받침, 가야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하자 금관가야의 대중교역이 타격을 입었으며, 4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가야지역까지 침공함으로써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인근 해안 국가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신라의 도움을 받은 뒤로는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등 신라의 통제를 받다가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가야의 명칭과 출처 문헌가야의 명칭과 출처 문헌



대성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대성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


금관가야의 생활 모습


김해 봉황대 유적은 2~6세기에 조성된 금관가야의 유적이며,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 봉황대 356-1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1907년 일본인들이 조개무지를 처음 조사한 뒤 지금까지 60차례 이상 발굴하여 조개무지, 대규모 집자리와 온돌, 제의시설, 토성, 창고 등을 확인하였다.


유물은 시루,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부뚜막 모양의 토기, 가락바퀴, 그물추, 뼈화살촉, 점치던 뼈, 한국 식동검과 끌 등 생활유물이 많았다.


가야 지역의 제출유적가야 지역의 제출유적



가야의 철기문화


가야는 철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제철기술이 발달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에 대해 "나라에서 철이 나므로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가져가며, 저자에서 사고팔 때 모두 철을 쓰는데 중국에서 돈을 쓰듯 한다. 또 2군에도 공급한다"고 철 생산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기록속의 철은 가야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는 납작 도끼와 철정 형태의 덩이쇠로 보인다.


2세기 중반부터 4세기까지 가야에서 철 생산과 유통 중심지는 금관가야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과 대성동 고분군에서 다양한 형태의 철기가 많이 출토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아라가야에서도 독자적으로 철을 생산하는 등 생산지가 다원화되었다. 대가야는 합천의 야로철산과 운봉고원의 철산지를 개발하여 5세기 이후 가야지역의 철기문화를 이끌었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