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는 삼국지에 구야국狗邪國,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언급되며, 변진 12국에서 성장하였다.
서기 42년 9명의 추장이 백성들과 함께 구지봉에서 하늘이 내려준 황금알 6개를 맞이하고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 가운데 수로首露를 왕으로 모심으로써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을 세웠다.
이런 건국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가야 주요 나라들의 세력 범위
금관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3~4세기경에는 철 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과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들에서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의 수로왕이 동해안에 위치한 음즙벌국, 실질곡국의 영토 분쟁에도 개입했다는 설화가 실려있어, 한때 금관가야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원통모양 청동기, 가야
바람개비모양 방패꾸미개, 가야
화로모양그릇받침, 가야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하자 금관가야의 대중교역이 타격을 입었으며, 4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가야지역까지 침공함으로써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인근 해안 국가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신라의 도움을 받은 뒤로는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등 신라의 통제를 받다가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가야의 명칭과 출처 문헌
대성동 고분군 출토 덩이쇠
금관가야의 생활 모습
김해 봉황대 유적은 2~6세기에 조성된 금관가야의 유적이며,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 봉황대 356-1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1907년 일본인들이 조개무지를 처음 조사한 뒤 지금까지 60차례 이상 발굴하여 조개무지, 대규모 집자리와 온돌, 제의시설, 토성, 창고 등을 확인하였다.
유물은 시루,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부뚜막 모양의 토기, 가락바퀴, 그물추, 뼈화살촉, 점치던 뼈, 한국 식동검과 끌 등 생활유물이 많았다.
가야 지역의 제출유적
가야의 철기문화
가야는 철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제철기술이 발달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에 대해 "나라에서 철이 나므로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가져가며, 저자에서 사고팔 때 모두 철을 쓰는데 중국에서 돈을 쓰듯 한다. 또 2군에도 공급한다"고 철 생산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기록속의 철은 가야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는 납작 도끼와 철정 형태의 덩이쇠로 보인다.
2세기 중반부터 4세기까지 가야에서 철 생산과 유통 중심지는 금관가야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과 대성동 고분군에서 다양한 형태의 철기가 많이 출토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아라가야에서도 독자적으로 철을 생산하는 등 생산지가 다원화되었다. 대가야는 합천의 야로철산과 운봉고원의 철산지를 개발하여 5세기 이후 가야지역의 철기문화를 이끌었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