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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왕과 어진 (대한제국을 중심으로), '국립고궁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2. 06:00

고궁 박물관에 들러서 찍었던 사진 올려봅니다. 경복궁만 가보다 여긴 처음으로 와봤는데,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좀 놀라기도 하고 기분도 좋고 그랬습니다.


조선의 국왕조선의 국왕



조선의 국왕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1910년 일본에 강점당하기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며 지속되었다. 왕은 강력한 지배 체제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어야 했으며 배우자인 왕비도 이에 걸맞게 덕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왕실 자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이에 부응하는 교육을 받아 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소양을 쌓았다.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지닌 왕은 마치 태양과 같은 존재였으며 왕권의 상실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었다. 탁월한 왕의 존재는 국가의 발전을 의미하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후손에게 길이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왕이 있는 자리에는 항상 왕의 상징물들을 놓아 그의 권위와 정통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왕은 많은 권한을 가졌으나 객관적이고 타당한 규율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체계를 정비하였다. 작은 일부터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왕이 행한 모든 일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물에 상세하게 기재되었다. 따라서 왕은 항상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바른 정치를 펼쳐야 했다.




조선왕조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래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이으며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민족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394년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국가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표방하였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통해 지방 행정조직에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양반관료제를 채택하여 개인의 소양에 따라 관료로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산업은 농업이었으며, 주로 상민常民 계층이 경작한 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산업구조가 다양화되고 신분제도의 예속성이 약해지는 등 점차 근대국가로의 길을 걸었다.




조선 국왕의 존엄과 일생조선 국왕의 존엄과 일생



국왕의 존엄과 일생

왕王이라는 글자는 천天, 지地, 인人을 나타내는 3개의 일一이 뚫을 곤( | )으로 연결된 형상이다. 즉, 국왕이란 덕으로써 우주宇宙(천지인)를 관통하는 존재이자 하늘의 명(천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였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은 어좌와 당가, 어보, 복식, 어진 등 각종 상징물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초월성을 나타내면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선의 국왕은 유교적인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세자시절부터 재위 이후가지 평생 동안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국정 운영의 소양을 쌓음과 동시에 고대의 이상적 군주상인 학자 군주(군사君師)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신성한 왕의 공간신성한 왕의 공간



신성한 왕의 공간

궁궐의 정전正殿은 국가의 중요의식을 행산 장소로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정전 중앙에 임금의 의자인 어좌御座가 놓이는데, 왕의 권위와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당가唐家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가의 상부는 보개寶蓋를 덮고,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한 쌍의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다.


높다란 단의 중심부에 어좌와 이를 감싸듯 펼쳐진 곡병曲屛을 함께 두고 뒤편으로 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묘사한 일월오봉日月五峯圖를 설치하여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였다. 어좌는 전면에 구름 속을 나는 용 문양을 금으로 그려 넣고, 모서리에는 황금색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여 최고 지존의 자리다운 위엄과 격식을 갖추었다.




아동용 교재 동몽선습아동용 교재 동몽선습



아동용 오륜 교육 교재, 동몽선습

학동들이 서당에서 천자문 다음으로 배우던 교재이다. 부자유진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을 간결하게 서술했다. 영조 대에 세자의 교육교재로 동몽선습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순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



순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

조선 23대 왕인 순조의 태내, 외항아리이다. 키가 작고 풍만한 몸체에 큰 뚜껑을 지니고 있으며 끈을 묶기 위한 고리는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다. 조선 후기 태항아리의 말기 형태를 보여준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었던 순조의 태실은 1929년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순조의 태실을 그린 그림순조의 태실을 그린 그림



순조의 태실을 그린 그림

순조의 태를 묻는 태실의 석물을 단장하고 주변의 산세와 경관을 묘사한 그림이다. 태실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안에 위치하며 태봉의 아랫부분에는 법주사가 그려져 있다.



왕의 초상인 어진왕의 초상인 어진


왕의 초상, 어진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眞殿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 국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 했다. 또한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은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어진은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조선 태조 어진, 고궁박물관조선 태조 어진, 고궁박물관



태조 임금 초상, 1997년 권오창 제작

조선왕조의 창업자인 태조太祖(재위 1392~1398)의 반신상이다. 원본은 1872년(고종 9) 고종의 명으로 19세기 도화서의 화원인 조중묵趙重默이 맡아 그린 것으로, 익선관과 청색 곤룡포 차림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조선 원종 어진, 고궁박물관조선 원종 어진, 고궁박물관



원종 어진

추존 임금 원종元宗(1589~1619년)의 어진으로, 제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년)의 생부로,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추존되다가 1632년(인조 10) 다시 왕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1632년 원종을 추존하기에 앞서,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남별전의 이름을 숭은전으로 바꾸고 이곳에 원종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원종 어진은 영희전 제3실에 계속 봉안되어 있었으며, 1872년(고종 9)에 한 차례 이모가 이루어졌다. 이 어진은 바로 이때 이모한 어진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이다.



순종 황제 초상, 고궁박물관순종 황제 초상, 고궁박물관



순종 황제 초상, 1997년 권오창 제작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재위 1907~1910년)을 그린 전신상이다. 면복 차림으로 황제국의 예에 따라 12류관 12장복을 갖추고 있으며, 얼굴은 순종 황제의 군복 차림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재위 1863~1907년)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한일 강제병합으로 퇴위당한 뒤 1926년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