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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에 적힌 고려 왕계 (이름은 오기라 쳐도 역사 흐름은 사실)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24. 13:04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도독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진晉나라 개운開運2년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武(2대 혜종)가 즉위하였으며, 한漢 나라 건우乾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昭(4대 광종은 아들이 아니라 이복 동생)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다 차지하매 소昭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국가에서 종실宗室과 공신에게 내려주어 거기서 나오는 조세를 받아 쓰게 한 고을인데, 체지采地라고도 한다. 사기전에 "무성武成의 6천호를 식읍으로 하사한다." 하였다)을 주었다.


고려 6대 성종고려 6대 성종

(출처 : 환상의 짝궁 성종과 최승로! 고려의 기틀을 다지다 | 고려 애니메이션 ★지니키즈 역사)


개보開寶 9년에 소가 죽고 아들 주(5대 경종)가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 국왕으로 봉하였고,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즉위하여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에 주가 죽으매, 아우 치治(6대 성종의 동생이긴 하나 계통이 다름. 태조 왕건의 손자)가 글을 올려 계승하여 봉작 받기를 원하므로 조칙詔勅을 내려 허락하였다. 순화淳化 6년에 글안契丹이 공격하자 치가 나약하여 지키지 못하고 북로北虜를 신하로 섬기면서 드디어 조공朝貢을 하지 않았다.


치가 죽고 아우 송誦(5대 경종의 아들 7대 목종)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3년에 그의 신하 주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강한 오랑캐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포상하고 효유曉諭하였다.


최승로의 개혁 - 지방관 파견최승로의 개혁 - 지방관 파견

(출처 : 환상의 짝궁 성종과 최승로! 고려의 기틀을 다지다 | 고려 애니메이션 ★지니키즈 역사)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송이 죽고 아우 순(8대 성종, 왕건의 손자)이 나라일을 권지權知하여 글안을 크게 깨뜨리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호尊號를 내릴 것과 정삭正朔의 반사頒賜를 바랐고, 또한 봉책封冊을 청하였다. 진종 황제眞宗皇帝는 처음에 그대로 따르려고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따라서 조서만 내렸다. 


천성天聖 연간에 사신이 여러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방물方物을 조공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보답하는 예禮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순이 죽고 아들 융隆(9대 덕종의 이름은 흠欽)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로北虜를 꺼리다가 드디어 다시 신하로 그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융이 죽으매, 정正이라고 사시私諡(친지나 제자들이 지어 주는 시호. 지위가 낮아 임금에게 시호를 받지 못한 덕망 높은 선비들이 가졌다)하였다. 


아들 덕왕德王 흠欽과 흠의 아우 목왕穆王 형亨도 모두 조공하러 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사신 보내는 것을 폐지했다.


형亨(10대 정종)의 아우 휘徽(11대 문종)가 희령熙寧 4년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방물方物을 조공하였고 7년과 9년에 사신이 거듭 왔으므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원풍元豊 원년元年에 좌간의대부左諫儀大夫 안도安燾로 국신사國信使를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건너갔었다. 이때 휘徽는 풍병風病으로 마비되어 겨우 명령을 받았고, 또한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상께서는 그가 아뢴 것을 보고 그대로 따랐다. 3년과 4년에도 계속 사신이 와서 조회했다. 6년에 휘가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문文’이라고 했다. 


왕건 유언 - 팔관회 연등회왕건 유언 - 팔관회 연등회

(출처 : 환상의 짝궁 성종과 최승로! 고려의 기틀을 다지다 | 고려 애니메이션 ★지니키즈 역사)


세자世子 훈勳(12대 순종)은 즉위한 지 백일 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운運(13대 선종)이 즉위했는데, 이때 좌간의대부 양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로, 예빈사禮賓使 왕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을 조위사弔慰使로,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 주구朱球를 부사로 임명하여, 7년 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8년에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즉위하매, 위문하는 사신과 하례하는 사신을 함께 보내왔다.


운運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宣’이라고 했다. 아들 요堯(14대 헌종의 이름은 욱昱)는 즉위한 지 1년도 못되어 병으로 폐위廢位되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叔父 희熙(15대 숙종의 이름은 옹顒)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회懷’라고 했다.


희가 곧 왕위를 승습하여, 원우元우 5년에서 원부元符 원년까지에 공사貢使가 두 번이나 왔다. 그래서 3년에 무마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元豊때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거룩하게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매, 사해四海의 안팎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덕이 번복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에 퍼졌다. 


고려 성종과 최승로의 개혁고려 성종과 최승로의 개혁

(출처 : 환상의 짝궁 성종과 최승로! 고려의 기틀을 다지다 | 고려 애니메이션 ★지니키즈 역사)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을 명하여 절節을 가지고 사신 가도록 하되,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륜恩綸이 분명하였다. 이는 고려에 은덕을 내리어 상을 주어 신임하고 무마함으로써 신고神考의 뜻을 더욱 거룩하고 훌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희熙가 글안 왕의 이름을 혐명嫌名하여 희熙를 고쳐 옹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神考 때부터 시작하여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매,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주어 고려 임금 휘徽가 봉작封爵을 잇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휘는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근간하고 후하였으며 장사치를 대접하는 데도 역시 체모가 있었고 정사는 인자와 용서를 숭상하니, 나라를 장구하게 누림이 당연하다. 숭녕崇寧 2년에 옹옹이 죽으니 나이 50세였고, 세자 오우가 즉위하였다. 

장흥長興 3년 임진任辰으로부터 금상今上 선화宣化 6년 갑진甲辰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 지 9세世인데, 무릇 17인으로서 합하면 1백 93년이다.


출처 - 고려도경 2권 왕씨 편


고구려의 고씨가 쇠퇴하자 고구려의 큰 씨족 중 하나인 왕씨가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것으로 글이 시작됩니다. 대략 고려 왕계에 대해 설명하는데 중간에 왕의 휘가 좀 다르네요. 아마도 송나라 입장에서 피휘할 상황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대체로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과는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나라 역사서에 적힌 고구려의 이름 모를 왕들이 걸립니다. 이름이야 다를 수 있다 쳐도 과연 그 역사까지 잘못 기록되었을진 의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