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카이두의 난, 대제국 분열의 고착화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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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카이두의 대두


카이두(海都)는 태종 오고타이칸의 다섯 번째 아들 카시(合失)의 아들이다. 따라서 바투를 비롯해서 구육이나 몽케, 거기에 쿠빌라이라고 하는 칸(汗)位 쟁탈의 중추적 인물이 모두 칭기즈 칸의 손자에 해당하는 것에 반해서 카이두는 한 세대 젊은 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분쟁 당시의 그는 아직 약관으로 新칸(汗)에게 반항할만한 역량은 도저히 갖고 있지 않았다.


몽케칸이 태종의 여러 자손 중에서 그를 선발해서 그들의 칸(汗)국의 일부를 나누어 준 그 시점에서는 확실히 타당한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두도 오고타이家의 일원인 이상 희종 시대憲宗朝가 되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진 가문이 된 비운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지 않았을 리는 없다.


카이두에게 할당된(所領) 카야릭크 땅이라는 것은 일리강 중류의 북방에 펼쳐진 초원으로 오늘날의 코팔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몇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하게 된 칸(汗)국에 명령하여 통일을 부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실력을 함양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꾹 참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던 시대가 당분간 계속되었다. 몽케 카한의 치세 9년간은 이러한 카이두에게는 아마도 매우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일리강과 카야리크일리강과 카야리크


왜냐하면,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는 정책은 착착 시행되어서 효과를 올린(예를 들면, 阿母河行尙書省이하의 3행성이 설치되어서 카한 직할지인 이들 남방 정주지역에 대한 여러 칸(汗)국의 야망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칸(汗)의 위광을 선양하는 외정은 혁혁한 전승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예를 들면 동으로는 아빌라이에 의한 티베트-운남 공략이 성공하고, 서쪽으로는 훌라그의 원정 때문에 이란, 이라크의 광대한 새로운 영토가 개척되었다) 쇠락한 칸(汗)국의 한 소영주로서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불과 9년 사이에 쌓을 수 있었던 실력 정도로는 이러한 칸(汗)에 대항할 수 있던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헌종 사후의 툴루이家 내부에 발발한 분규와 내전은 카이두에게는 정말로 단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와의 사이에 야기된 칸(汗) 쟁탈전에 즈음해서 카이두는 후자에 가담했다. 다만 아리크부카 측에 가담했다고 해도 진정한 아군이 된 것은 아니다. 양자 어느 쪽이든, 다시 말해 툴루이 가문이니까 어느 쪽의 승리도 마음속 깊이에서 원할 리가 없었다.


유럽풍의 아리크부카유럽풍의 아리크부카

(출처 : 孛儿只斤·阿里不哥)


단지 아리크부카의 세력은 카이두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외관상이라도 그에게 가담한 척 가장하지 않으면 신상이 위험했다. 따라서 군을 이끌고 그 진영에 직접 참가하는 등의 행위는 물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내전이 가능한 한 지연되고 양자 모두 완전히 피폐하기를 그는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술했듯이 이 전투에서의 쿠빌라이 측의 전력戰力은 압도적이어서 불과 1년 남짓으로 실질적인 승패는 결정되고 말았다. 카이두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툴루이가의 이 내전이 역시 카이두 흥기의 요인을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쪽으로 인접南接하는 차가타이칸國이 이 내전의 영향을 정면으로 받아서 빈번한 카한의 교체와 내란을 반복하여 그것이 카이두 세력의 확장을 도왔기 때문이다.


카이두칸의 반란 


카이두는 기회를 틈타 차가타이 한국의 영토를 침범하고 그 수도 알마릭크를 포함한 상당지역을 점령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잠식은, 가령 그것이 카한國 간의 사건이라고 해도 대제국에 기존하는 질서의 파괴라고 해서 카한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을 것인데, 그때의 정황은 내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묵인되었다고 생각된다.


1260년 아시아 형세1260년 아시아 형세


이 결과로 카이두 세력은 확실히 일약 강대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전을 극복한 쿠빌라이 카한이 지원 원년(1264) 카이두 이하의 제왕諸王에게 입조入朝를 명했을 때 그는 "말이 병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핑계를 대서 입조하지 않는 카이두에게 모반의 기미를 느낀 세조 쿠빌라이 카한은 조치家, 차가타이家의 수령 만그 티무르와 보라크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만일에 대비한 포위계획을 준비시켰다.


이것이 카이두에게 위기감을 준 것 같다. 1266년 그는 마침내 봉기해서 동부국경에 주둔하는 원나라 부대를 습격하고 격파했다. 카한에 대한 이 공연한 무력공격을 계기로 해서 이후 40년간에 이른다. 이른바 "카이두의 난亂"이 개시된다.


원나라로부터의 당장 위협은 배제한 카이두는 전면전 양상의 태도로 서서히 西面의 적에 임해서 결국 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1269년 봄 타라스 초원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카이두, 만그 티무르, 보라크 3자 간에 동맹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 동맹을 성립시키기에 이른 요인은, 다름 아닌 카이두가 제안한 소그디아나 분할의 좋은 미끼였다. 시르천의 남쪽에 옛날부터 상업 도시국가로 번영해온 소그드 땅은 유목초원 국가인 서북 3카한國이 전부터 탐을 내고 있던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장성 밖의 이민족 국가가 한나라 영토漢地에 탐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소그디아나 일대소그디아나 일대


그렇지만 앞서도 논했듯이 이 지대는 칸(汗)의 직할령에 속해 있었다. 칸(汗)의 권위가 다소라도 완화될 때까지는 섣불리 손대서는 안 된다. 여러 칸(汗)국의 이러한 야망은 태종 사후에 계속되는 조정의 불안정을 틈타서 점차 노골화되었는데 그것을 강하게 억제한 것이 헌종의 통치였다.


그런데 이제는 헌종이 죽고 거기다가 칸(汗)위 쟁탈을 위한 내전이 발발해서 조정의 기강에 공백이 생겼다. 카이두는 이러한 대세를 잘 파악하여 3칸(汗)國이 연합하면 소그다아나의 점유는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제안이야말로 만그 티무르 및 보라크 두 사람을 동시에 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타라스 초원의 회의는 3칸(汗)國의 동맹을 성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카이두를 칸(汗)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비록 카이두에게 칸(汗)위를 용인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맹주, 즉 동맹의 리더로 간주했을 따름이지 결코 그에게 종주권까지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두에게는 명목적인 칸(汗)이었다고 해도 그에 따라 오고타이 후예의 제왕을 규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넓게는 反세조의 제왕諸王들까지도 휘하에 모으는 편의와 권위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태종의 가문 중에서도 제왕 카단과 문게트라고 하는 역력한 여러 영주로서 원나라 측에 가담하는 자도 보이고, 오고타이 칸(汗)국은 아직 완전히 통합되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287년. 나얀의 반란1287년. 나얀의 반란


3칸(汗)國의 동맹이 성립되자 원나라에 대한 카이두의 군사행동은 점차로 활발해졌다. 비슈바릭크를 빼앗고 위구르국을 위협하고, 그리고 몽고리아 내부에까지 침입하는 일도 세 차례 있었다. 특히 1287년 동방의 흥안령 방면에 所領을 가진 칭기즈 칸 여러 동생의 자손이 제왕諸王 나얀에게 인솔되어서 카이두에세 호응했을 때는 원나라도 일시 위기에 몰려 7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세조 스스로 출진하는 사태를 유발했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는 한 양군의 戰果는 일진일퇴를 보이고 거의 동경 85도선으로 경계를 긋고 있었다.


이 쟁패전은 쿠빌라이 측이나 카이두 측이나 전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세대代로 넘겨졌다. 그리고 1303년 카이두의 장자 차파르와 차가타이家의 수령 두아가 강화를 신청하기에 이르러서야 격심했던 분쟁도 비로소 종결되는 것이다. 그때가 바야흐로 원나라에서는 세조가 죽고 이미 9년 그를 뒤이은 황손 테무르 카한 성종의 대덕 7년(1303)이었다.


노년의 카이두노년의 카이두

(출처 : baike 이미지)


"카이두의 난"은 이렇게 해서 겨우 종국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기회로 생긴 대제국의 분열은 이제는 어찌할 수도 없어서 亂 이전의 대통일은 결코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었다.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창시된 원나라는 그 애초부터 동경 85도선 이동의 동아시아권에 한정되는 정권이라는 특색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두의 난"이 약 반세기 만에 종식되었음에도 몽골제국은 끝끝내 통일체로 복원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칸國은 이 시점에서는 이미 각각 개성 있는 독립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동방의 정주지역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혹은 이슬람적-이란적, 또는 투르코-이슬람적 문화요소에 의한 수식을 통해서 예전부터의 단일 유목 국가의 다양화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공통의 기반이 희박해진 몽골 여러 칸국은 이후 각자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동아시아에 분리 한정되었던 원나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지 동방에는 동방 독자의 형식이 있을 뿐이다.


출처 - 원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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