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초한지와 삼국지를 이어주는 전한, 후한지, 장개충
흉노를 달래는 효문제
하, 은, 주 3대 이래로 중국에서는 언제나 흉노족이 환난과 재해의 근원이었다. 한나라 황실에서는 그들 강약의 시기를 알아채고 군비를 갖추어 그들을 정벌하고자 했다. 흉노족은 대체로 북쪽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하며 이리저리 이동하며 살았다. 특히 천고마비, 가을철에 말이 살찌면 한바탕 약탈하여 풍성한 겨울을 지내곤 하였다.
그들의 가축에는 말, 소, 양이 많았고,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해가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있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농사도 짓지 않았으므로 나누어 가질 땅도 없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풍습은 평화 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생계를 세웠고, 전쟁이 일어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원 전투에 임해 침략과 공격에 나서는 것이 그들의 천성이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이 가축의 살코기를 주식으로 삼았으며 그 가죽으로는 옷을 해 입었다. 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의 몫이었고 그 나머지는 노인들이 먹었다.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들은 자연히 다음 차례였다. 아비가 주우면 그 아들이 아비의 후처들을 아내로 삼았고 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 그들 풍습에서는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이름을 불렀고, 성이나 자 같은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흉노 묵돌 선우 상상도
(출처 : 360doc)
묵돌冒頓이 자립해서 추장 선우單于가 되었다. 선우의 도읍지(외몽고의 탑미이하塔米爾河의 북방)는 대군代郡과 운중군雲中郡을 경계하고 있었다. 매년 정월에는 24인의 군단장들이 선우의 왕정왕정에 모여 소규모의 회합을 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5월에는 제천祭天하는 왕정 남쪽의 농성籠城에서 대규모 회합을 가지고 그들의 조상, 하늘, 땅 및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 무렵에는 제사 지내는 숲, 대림에서 대집회를 열고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그들의 법률에서는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칼집에서 뽑은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자는 그의 가산을 전부 몰수했다. 가벼운 범죄자는 수레바퀴로 뼈를 부수는 알형軋刑에 처했으며 중범죄자는 사형에 처했다.
한나라 원제 시기 흉노 왕소군의 모습
(출처 : 《匈奴与中原文明的碰撞与交融》展览油画撷图欣赏)
선우는 매일 아침 막영幕營에서 나와 일출을 보며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나 거사를 할 때는 달의 상태를 주로 보았다. 즉 달이 차고 빛나는 보름이면 공격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퇴각했다. 적을 공격해서 목을 베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 잔의 술을 내렸고, 노획품은 그대로 본인이 갖게 했다. 포로 역시 잡은 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전투 시에는 제 이익을 위하여 맹렬하게 달려나갔다. 그들은 적을 발견하면 이익 때문에 새떼들처럼 모여들었고 곤경에 빠져 패색이 짙게 되면 구름처럼 조각조각 흩어졌다. 전쟁터에서 전사자를 거두어 돌아오면 그 전사자의 재산과 집안 식구들을 모두 차지하도록 했다.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붕어하고 효혜제, 여태후의 시대가 되었을 때였다. 묵돌이 여태후에게 교만하고 망령된 편지를 보내왔다.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소. 이참에 나하고 혼인하는 것이 어떻겠소!"
한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감히 오랑캐 따위가 태후를 희롱하다니!"
"더는 논의할 것 없습니다. 당장 대군을 일으켜 묵돌의 목을 벱시다!"
그러나 많은 장수가 이성을 되찾았다.
"지난날 고제의 현명함과 용맹을 가지고서도 그들을 응징하기는커녕 평생에서의 곤욕(일주일간 억류)까지 겪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정벌은 불가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겨울 사냥에 나선 흉노족
(출처 : 《匈奴与中原文明的碰撞与交融》展览油画撷图欣赏)
여태후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으면서 정벌을 그만두기로 하고 다시 흉노와 화친을 계속하도록 방침을 고수했었다. 그리고 효문제가 즉위해서는 화친조약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도 그의 3년 5월에 흉노 우현왕이 북지北地에 침입하여 요새를 공격하여 살상하고 약탈했다. 황제가 처음으로 섬서성 감천궁甘泉宮에 행행行幸하여 조칙을 내렸다.
"한나라는 흉노와 맹약하여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며 한의 변경을 침해하지 않도록 흉노에게 매우 많은 물자를 수송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우현왕이 자신의 국토를 떠나 군사를 이끌고 황하 북쪽의 항지降地(옛 흉노가 한에게 항복하여 얻은 땅)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변고가 아니다.
그들은 가까운 요새를 왕래하면서 우리의 군사를 살육하고 있다. 또 변경의 관리를 짓밟고 침입하여 약탈하는 등 매우 오만하고 방자하였다. 이것은 맹약을 위반한 것이다. 변경의 거기車騎 8만5천을 동원하여 섬서성 고노高奴로 진격하라!"
승상 관영을 파견하여 흉노를 치게 했더니 흉노가 잠시 요새 밖으로 물러나는 듯했다. 그때 효문제는 산서성 태원太原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제북왕 유흥거가 반기를 들어 병사를 일으켜 형양滎陽을 치려고 했다.
전한 문제. 문경지치의 주인공
(출처 : 바이두 이미지)
그래서 황제는 조칙을 내려 승상의 출정을 중지시키고 진무陳武를 파견하여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제북왕 유흥거를 치게 했다. 황제가 태원에서 장안에 이르러 조칙을 내렸다.
"제북왕은 덕의德義를 어기고 주상을 배반하고 이민吏民을 오도誤導하여 반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대역을 저질렀다. 만약 제북의 백성으로 황군皇軍이 이르기 전에 스스로 평정을 회복한 자와 항복하는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본래대로의 관작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북왕 유흥거에게 가담했다 하더라도 반군을 떠나서 항복하는 자들 역시 모두 용서할 것이다."
제북왕의 반란이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얼마 후 황제는 흉노의 침입을 번거롭게 여겨 비단과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 등 여러 선물을 바리바리 싸 보내며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 그중에는 흉노족이 항상 꿈꿔 그토록 원하는 공주를 선우에게 보내 연지連枝로 삼게 했다. 연지란 '한 뿌리에서 난 이어진 가지'라는 뜻으로, 형제자매를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한나라 원제 시기 우의를 쌓는 호한야 선우
(출처 : 《匈奴与中原文明的碰撞与交融》展览油画撷图欣赏)
그런데 보내고자 했던 공주는 수많은 궁녀 중에서 가장 못생긴 궁녀를 뽑아 공주로 가장하여 보내졌다. 뽑히게 된 궁녀의 사연은 이러하다. 본시 양가집에서 선택된 자녀는 궁에 보내는 절차가 있었다. 일단 궁에 들어가면 궁녀의 얼굴을 그려 황제에게 보이고, 황제가 원하는 그림 속의 궁녀를 낙점하여 수시로 시중들게 하는데, 모든 궁녀는 한결같이 그림 그리는 화가에게 뇌물을 듬뿍 주어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그려주길 바랐다.
오늘 흉노족 선우에게 보내기로 한 궁녀는 본시 가난하여 환관들이나 화가에게 뇌물을 쓸 여유가 없었기에 아주 못생긴 추녀로 그려진 궁녀였기에 낙점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황제의 총애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 그녀의 모습은 궁녀 중 가장 빼어난 절세의 미모를 지난 자였다.
떠나기로 한 날, 황제를 알현하여 인사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대신들은 물론이고 황족들이 모여 사신단을 송별하는 예를 갖추는 자리였다. 모든 사신의 예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공주로 가장한 궁녀가 입실하였다. 아뿔싸! 휘둥그레진 황제의 눈동자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는 비길 사람이 없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을 절세가인이라 하던가?
말희 일러스트
(출처 : 自古山东出皇后 盘点历史上10位山东籍第一夫人)
그동안 중국 역사상 사직을 무너뜨린 경국지색傾國之色, 말희末喜 보다도, 월나라의 서시西施 보다도 한결 더 나았다. 아니 그들을 다 합쳐놓은, 형용할 수 없는 단어가 없을 지경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황제는 저런 미인을 왜 여태껏 보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막급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취소한다거나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황제와 모든 제신은 떠나는 사신단의 배웅을, 아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더 보고자 십 리고, 이십 리고 뒤쫓았다.
그때 마침 가을 하늘빛 위로 기러기 떼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앞서가던 기러기 무리가 그 여인을 바라보고는 자리를 이탈하더니 정신을 놓았는지 떨어져 개울에 처박히고 있었다. 뒤에 사람들이 전하길, "흉노 땅에 가는 동안 하얀 달빛 아래 미인(월하미인)이 아니라 달빛이 그 여인의 모습에 부끄러워 구름 속에 숨더라"고 전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