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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당포파왜병장]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3. 04:00

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1592년 6월 초6일,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은 남겨두었던 배를 타고 틀림없이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라 했다.


그는 그가 통솔하는 배를 거느리고 새벽에 바다 어귀로 나가 기다렸다가 나오는 왜선을 모조리 잡아 놓고 얼른 보고하였다.


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당포파왜병장]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당포파왜병장]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이글루스)


"오늘 새벽녘(1592년 6월 5일)에 당항포 어귀에 도착해 기다리니, 과연 조금 있다가 왜선 한 척이 바다 어귀로 나왔습니다. 재빨리 돌격하였는데 그 배에 타고 있는 놈은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편 배에서 먼저 현자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여포蒺藜砲, 대발화大發火 등을 잇달아 쏘고 던졌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도망가려 하므로, 갈고리를 써서 배를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었더니 절반이 넘게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이가 대략 24, 5세쯤 되어 보이는, 풍채가 건강하고 의복이 화려한 왜장이 칼을 집고 혼자 서서 지휘했는데, 남은 부하 여덟 명과 함께 대항하면서 끝내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왜장을 향해 힘껏 쏘아 맞히니 화살을 10여 대 맞은 뒤에야 소리를 지르며 바닷물로 떨어졌습니다. 곧 목을 베게 하고, 다른 왜적 여덟 명은 군관 김성옥金成玉 등이 힘을 모아 총과 활을 쏘아 죽이고 또 목을 베었습니다.


그날 아침 9시쯤(1592년 6월 6일), 적선을 불사를 때 경상 우수사 원균과 남해 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와서 물에 빠져 죽은 왜적들을 두루 찾아 건져 내어 머리를 벤 것이 50여 개나 되었습니다. 왜선의 뱃머리에는 특별히 서늘하게 양방凉房을 만들어 두었는데 방 안의 장막이 극히 화려했습니다.


고성 당항포 해전 격전지1592년. 고성 당항포 해전 격전지


옆에 문서를 가득 넣은 작은 궤가 있기에 집어서 보았더니 왜인 3천 4백여 명에 대한 분군기分軍記(각 요지에 분산하여 주둔시킨 군사들에 대한 기록)였습니다. 각기 자기 이름 아래 서명하고 피를 발랐으니 필시 맹세하던 문서인 듯하였습니다.


분군기 여섯 축과 갑주, 창, 칼, 활, 총통, 표범 가죽 안장 등 물건을 올려 보냅니다."


직접 그 분군기를 살펴보니 이름을 쓰고 피를 바른 자취가 과연 보고한 말과 같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말로 하기 어려웠다. 왜인의 머리 아홉 가운데 장수의 머리는 방답첨사 이순신이 따로 표를 올려보냈다.


고성 당항포 1592년 이순신


왜인의 깃발에 물들인 빛이 각기 달랐다. 전날 옥포는 붉은 기, 오늘 사천은 흰 기, 당포는 누런 기, 당항포는 검은 기였는데, 그 까닭을 생각하면 반드시 각 부대를 분간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피를 바르고 맹세한 글이 또 이와 같으니 일찍부터 우리를 침범할 마음을 품고 준비하였던 상황을 더욱 짐작할 수 있겠다.


이날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어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항포 앞바다에 옮겨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했다가 저녁때 고성 땅 맛을우장亇乙于場 바다 가운데로 옮겼다.


1592년 당항포해전 기념탑1592년 당항포해전 기념탑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이글루스)


1592년 6월 초7일. 아침 일찍 배를 내어 웅천 땅 증도甑島(창원군, 경남 마산시 구산면 시루섬) 바다에 진을 쳤다.


천성과 가덕에 있는 적의 종적을 탐색하던 선장 진무 이전李筌과 토병 오수吳水 등이 왜인의 머리 두 개를 베서 10시쯤 급히 돌아와서는,


"가덕 앞바다에서 한배에 타고 있던 왜인 셋이 우리를 보고 달아나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쫓아갔습니다.

다 쏘아 죽이고 머리 셋을 베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이름 모를 군관이 배를 타고 와서 위협하고 뺏어 갔습니다."


하였다.


고성 당항포 해전 1592년 방답첨사 이순신


각별히 술을 먹여 그들을 곧 천성 등지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가덕, 천성 쪽으로 가다가 좌도 몰운대에서 양편으로 나누어 적의 무리를 수색하였으나 적들이 멀리 도망하고 아무 흔적도 없었다. 초저녁에 거제 온천량 송진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1592년 6월 초8일, 적의 자취를 찾아보려고 창원 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배를 보내 놓고, 창원 땅 증도 남포 앞바다로 나가 진을 쳤다. 저녁때 망보는 배가 돌아와, 그 어디에도 적의 자취는 없다 하므로 송진포로 다시 돌아왔다.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6월 14일

난중일기, 송찬섭,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