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동진에서 화자가 되었던 사마유 vs 사마충 논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12. 22:00

당시 사람들이 모여서 진 무제晉 武帝(司馬炎, 사마염)가 제왕齊王(사마염의 친동생 사마유司馬攸)을 밖으로 내보낸 것과 혜제惠帝(사마충, 司馬衷)를 세운 것은 어느 쪽이 더 심한 실책이었는지를 논했다. (1) 대부분 사람은 혜제를 세운 것이 더 중대한 실책이었다고 했는데 환온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아들에게 부업父業을 잇도록 하고, 동생에게 집안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인데, 그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오?" (2)


사마염의 친동생 제왕 사마유사마염의 친동생 제왕 사마유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유효표의 주.


(1) 진양추晉陽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왕 사마유의 자는 대유大猷이며 문제(사마의의 둘째 아들 사마소)의 둘째 아들이다. 효경孝敬 충성스럽고, 청아-공평했으며, 현인賢人에게 친절히 대하고 선비에게 겸양하며, 어질고 은혜로워 베풀기를 좋아했다. 문장을 잘 지었고 서간문에 뛰어났다.


처음에 순욱荀勖과 풍담馮紞은 무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사마유는 순욱이 아첨하는 것을 미워했다. 순욱은 사마유가 황제의 자리를 잇게되면 틀림없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더구나 사마유는 여러 사람에게 큰 신망衆望을 얻고 있었으며, 조정의 제현諸賢들도 모두 그에게 추종하고 있었다.


쌀이 없으면 고기죽 먹으라던 진혜제쌀이 없으면 고기죽 먹으라던 진혜제

(출처 : 晋惠帝的肉糜论没错:只因环境不对称)


때마침 황제가 병이 들자, 사마유와 태자가 입궐하여 문병했다. 조정의 인사들은 모두 사마유를 주목하며 태자는 돌아보지 아니했다. 그러자 순욱이 조용히 아뢰었다.


"폐하께 만일의 경우가 있으면 태자께서는 제위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무슨 이유요?"


황제가 묻자 순욱이 대답했다.


"안팎의 백관들 모두가 제왕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므로, 태자께서는 도저히 제위에 못 오르십니다. 폐하, 시험 삼아 조서를 내리시어 제왕을 그 나라로 돌아가게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온 조정이 들고일어나서 반대할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된다면 제가 드린 말씀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시중인 풍담도 아뢰었다.


"폐하, 제후들을 꼭 5등으로 나누어 봉하시려면 마땅히 가까운 친족부터 하여야 합니다. 가까운 친족이라면 제왕을 따를 분이 없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조서를 내리어 사마유는 귀국하라고 하였다. 사마유는 순욱과 풍담이 자기를 모함했다는 말을 듣자 근심하고 분노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궐하여 작별을 고하고 나오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제는 그의 죽음을 한탄하고 슬퍼했다.


후궁이 너무 많아 랜덤한 생활을 했던 사마염후궁이 너무 많아 랜덤한 생활을 했던 사마염

(출처 : 晋武帝荒淫无度选上万宫女 大臣遍是吃货和土豪)


풍담이 옆에 모시고 있다가 말했다.


"제왕은 명성이 그 실체를 웃돌아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하여 폐하께서는 어찌 그렇게도 슬퍼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황제는 애통해함을 멈추었다. 유의劉毅는 그 말을 듣고 일부러 병을 핑계 대며 벼슬하지 않았다.'


(2) 무제가 재앙과 난리를 얘기하여 중원을 망하게 한 것은 실로 여기에 있었다. 세상에서는 비천한 자들까지도 이 일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하물며 선무宣武(선무장군 환온)와 같이 뛰어난 준재임에랴.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


세설신어 中, 품조品藻(인물을 비교하고 우열을 가림으로써 품평을 가하는 일)편 32화

세설신어 中, 안길환, 명문당, 415p~417p


동진 시기에도 진무제 사마염의 후계자 선택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유효표는 환온은 당대 지식인인데 그런 어이없는 말을 했을 리 없다며 기록이 잘못되었다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를 보건대, 그 당시에도 혜제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은 게 사마유를 내친 것보다 더 큰 잘못이라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서진남북조 연재편중 제가 이를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마염이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부부 금실이 좋았다 (사마염과 양황후)

둘째, 사마염은 귀가 얇았다

셋째,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이 총명했다

넷째, 양씨와 가씨의 정치적 결탁


양황후는 일전에 사마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적통을 세우는 것은 장유長幼로 하는 것이지 현우賢遇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귀가 얇은 사마염의 대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양황후의 뜻을 받아들이는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사마염에겐 아들이 26명이나 되었는데 팔왕의 난에 참가한 초왕 사마위,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처럼 영특한 아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마염은 손자 사마휼과 권신 가충의 딸인 가남풍이 사마충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으리란 큰 착각을 했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 사마충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 사마충

(출처 : 司马懿yì家族的兴盛与名字)

(司马懿↗司马师↗司马昭↗司马炎↘司马衷↘)


애초부터 사마염은 위관의 딸을 맞아들이려 했으나 귀가 얇은 그는 흉포한 성격의 가남풍을 칭송한 곽괴(가남풍이나 곽괴나 비슷비슷)의 말에 속았고, 위관의 딸 대신 흉포한 가남풍을 태자비로 맞은 건, 안 그래도 망해가는 제국의 숨통마저 옥죄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간신히 태자비가 된 가남풍은 이후에도 궁녀가 낳은 사마충의 아들을 죽여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양황후가 가충의 공훈을 내세워 두둔하는 덕택에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다.


사마염은, 부부의 금실이 좋아 양황후의 말만 듣고 사마충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과 가남풍을 내치지 않았다.

사마염은, 귀가 얇아 가남풍을 맞아들이고 사마충의 어리석은 행동과 말을 애써 무시했다.

사마염은, 사마휼에게 큰 기대를 했는데, 그 이유로 가남풍이 사마휼을 타락하게 만든 뒤 죽이도록 만들었다.

사마염은, 훗날의 정쟁을 예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 사마염 생전처럼 가씨와 양씨는 손을 잡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은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예전 댓글.


A1. 시작부터 정통성이 너무 없어서 처음부터 지방호족들에 대한 통제권이 아작난 국가가 오래갈 수는 없죠 사마유던 사마충이던 서진 경우는 시작부터 망할 나라였던 거죠. 조조의 방법이나 사마염의 방법이나 영 좋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거죠.


삼국지의 세계였었나... 예전에 봤던 어느 책에선 서진이 막장이었어도 "이러면 망하는구나"라는 교훈을 이후의 통일 왕조들에게 인식시켜줬기에, 이 점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A2. 그러고 보면 북위나 북주, 북제가 호족들을 아작낸 건 교훈을 충실히 따른 면도 있어 보여요. ㅎㅎㅎ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