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이름 - 재위 기간 - 재위 연도
31. 아락阿洛 - 41 - B.C.1224
32. 솔귀率歸 - 48 - B.C.1184
33. 임나任那 - 33 - B.C.1137
신미년(B.C.1130)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냈다.
34. 노단魯丹 - 14 - B.C.1105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35. 마밀馬密 - 19 - B.C.1092
36. 모불牟弗 - 21 - B.C.1074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을 두었다.
37. 을나乙那 - 41 - B.C.1054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38. 마휴麻庥 - 3 - B.C.1014
39. 등나登那 - 30 - B.C.1012
40. 해수奚壽 - 42 - B.C.983
41. 오문루奧門婁 - 49 - B.C.942
42. 누사婁斯 - 29 - B.C.894
43. 이벌伊伐 - 27 - B.C.866
44. 아륵阿勒 - 5 - B.C.840
45. 마휴麻休, 麻沐 - 42 - B.C.836
46. 다두多斗 - 34 - B.C.785
47. 나이奈伊 - 31 - B.C.752
48. 차음次音 - 42 - B.C.722
49. 불리不理 - 1 - B.C.676
50. 여을餘乙 - 30 - B.C.676
은과 주의 세력 범위
51. 엄루奄婁 - 29 - B.C.647
무인년(B.C.643),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52. 감위甘尉 - 7 - B.C.619
53. 술리述理 - 11 - B.C.613
54. 아갑阿甲 - 16 - B.C.603
경오년(B.C.591)에 천왕은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55. 고태高台 - 15 - B.C.588
56. 소태이蘇台爾 - 19 - B.C.574
57. 마건馬乾 - 22 - B.C.556
58. 천한天韓 - 11 - B.C.545
59. 노물老勿 - 16 - B.C.535
60. 도을道乙 - 16 - B.C.520
61. 술휴述休 - 35 - B.C.505
62. 사양沙良 - 19 - B.C.471
63. 지한地韓 - 16 - B.C.453
64. 인한人韓 - 39 - B.C.438
65. 서울西蔚 - 26 - B.C.400
66. 가색哥索 - 35 - B.C.375
전국시대 연나라 영토
(출처 : 战国时代七雄争霸:从魏国“一家独霸”到六国称王)
67. 해인解仁 - 1 - B.C.341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解仁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68. 수한水韓 - 18 - B.C.340
69. 기후箕詡 - 9 - B.C.322
임오년(B.C.339)에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 번 2한韓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B.C.322)년에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箕詡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70. 기욱箕煜 - 26 - B.C.315
71. 기석箕釋 - 40 - B.C.290
72. 기윤箕潤 - 30 - B.C.251
73. 기비箕丕 - 12 - B.C.222
처음 기비箕丕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箕丕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74. 기준箕準 - 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ps. 세 글자로 이름을 짓다가 지친 나머지 두 글자로 줄여버린 저자의 노고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위만조선의 영역
(출처 : 바이두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