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신라는 왜를 정벌했을까, 기록 [동사강목, 부상록, 순암선생문집, 연려실기술]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2. 1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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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도와 오사카(나니와) 위치절영도와 오사카(나니와) 위치


1.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이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오사카)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 신해년은 응신 22년.


2. 동사강목 제3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일본 응신천황 상상도일본 응신천황 상상도

(출처 : 바이두 백과)


응신천황석비응신천황석비

(출처 : 中国文化东传日本)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 서력 583년.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번)이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절영도 태종대 유적지절영도 태종대 유적지

(출처 : 釜山太宗台)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도이島夷, 왜놈)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3.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정사년(광해 9, 1617) 10월 18일(기묘)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일본 팔번궁신사八幡宫 응신천황일본 팔번궁신사八幡宫 응신천황

일본 팔번궁신사八幡宫 응신천황2일본 팔번궁신사八幡宫 응신천황2

(출처 : 八幡宫供奉“引汉字入日本”的应神天皇。日本14)


4. 안정복/ 순암선생문집 제1권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유례왕 8년이 맞음)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서력 291년)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서력 583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일본 원정천황일본 원정천황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白馬塚在日域]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倭人世世勤封築]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謂昔羅王憤侵軼]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올 때


[精兵數萬浮海伐]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馮夷淪易海若奔]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大海以東無涯藩]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揚龍旆擊鼉鼓]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前茅直擣明石浦]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倭王失色事和親]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刑牲載書告明神]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從此鯨波久不涌]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千古勝蹟留遺塚]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絶影又有古壘寨]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後人說是太宗臺]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彈丸羅地在一隅] 총알만 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猗歟兵力何壯哉]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歸來後世事反古]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大東全地受侵侮] 우리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至今海上多虛喝] 지금도 해상에는 하고많은 공갈배가

[穀帛年年充其欲]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靜思其故豈無因] 생각하면 그리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書生謾有安邊策]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5. 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 서쪽 변방西邊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을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 신경준申景濬 여암고旅菴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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