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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 2

관구검을 막아낸 동천왕 기록의 의문점-조선상고사

관구검毌丘儉의 침략과 제2 환도丸都의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沸流水)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 벴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수는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

동아시아 역사 2017.05.23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고구려高句麗위진남북조 시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형성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고구려이다. 이는 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요동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쳐 설치된 요동군, 현도군 등 한제국의 파견기관과 직접 접촉하면서 투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요동에서 반쯤 독립한 한인인 공손씨 세력과 화북을 제압한 위나라와의 접촉, 투쟁에서도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238년 위나라(위진남북조의 위를 말함)에 멸망한 공손씨의 반독립국에는 184년 황건의 대란으로 시작된 화북의 혼란을 피해 많은 한민족이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시의 일류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도의 중국 문명이 요동지방에 현실적으로 뿌리를 내..

동아시아 역사 2016.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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