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쇠퇴하는 중국 북위와 무능한 호태후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23. 05:30
반응형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쇠퇴하는 중국 북위와 무능한 호태후


2001년 발굴된 북위 초기 무덤의 유물[북위 말기 무능한 호태후] 2001년 발굴된 북위 초기 무덤의 유물


호태후 시기, 심화하는 지방 군인의 불만

정년격으로 인해 폭발 점까지 달해 있던 우림, 호분 군사의 불만은 일단 해소되었으나, 이런 인사의 퇴폐로 인하여 관계官界의 분위기가 침체한 것은 당연했다. 육진의 난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던 북족 군인의 불만은 이것으로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지방 특히 변경에 배치된 군인들의 불만이었다.


중국 북위의 화북 지배는 요소요소에 비치된 진鎭과, 진이 주州로 전환된 후에도 아직 그곳에 주둔하는 북족 군사의 군사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의 우림, 호분의 군사만큼은 아니라 해도 역시 군인으로서 북위를 지탱한다는 높은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효문제 이후 귀족제 국가로의 전환은 이들 군사를 내버려 둔 채 문치주의 노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벼슬길로 나갈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분은 격하되어 진병鎭兵이라는 사실과 군적에 있다는 사실이 통혼의 걸림돌로까지 되었다.


이는 우림, 호분 군사보다도 훨씬 비참한 상황으로, 중앙에 거주하며 귀족풍 생활에 익숙해진 동족과의 사이에 격심한 차이를 낳았다. 그 모순이 가장 심했던 곳은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의 장성지대, 곧 국방의 제1선에 배치된 소위 북진北鎭이었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 옥야沃野, 회삭懷朔, 무천武川, 무명撫冥, 유현柔玄, 회황懷荒 등의 6개 진을 중심으로 하여 524년, 드디어 중국 북위 제국의 붕괴를 부른 대반란의 막이 올랐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육진의 난이다.


이 반란은 6진의 병사들이 극심한 차별과 굴욕에 대한 비분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북위 6진의 배치도, 때로는 7진이라고도 함[북위 말기 무능한 호태후] 북위 6진의 배치도, 때로는 7진이라고도 함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북진의 군사들은 원래 호, 한의 양가 출신으로 벼슬길도 열려 있었고 요역 면제의 특권도 있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효문제 무렵부터 사태가 달라졌다.


한족계 군인은 군적을 면하게 되어 사대부 생활로 돌아가는 반면, 새로운 유형자流刑者(요즘의 범죄자, 범법자 정도가 됨)가 속속 진병으로 보내져 종래 호족계의 명예로운 군사들도 이윽고 유형자와 같은 부류로 간주하고 천민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호府戶, 즉 진장의 장군부에 예속되는 군호라고 불리며 진장에게 천민처럼 사역 당하게 되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황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진장에 임명되었지만, 낙양천도 후에는 북변 방위가 경시됨에 따라 진장에는 용렬한 인물만이 임명되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는 것에만 열을 올렸고, 중앙에서 좌천되어 온 관리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진에서는 뇌물 없이는 되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진장鎭將과 진병鎭兵 간의 영예로운 중국 북위 국군장병의 결합 관계가 수탈과 예속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523년의 봄에 옥야진에서, 성을 파육한破六汗이라 하고 이름이 발릉拔陵이라고 하는 진민이 진장을 죽이고 진왕眞王 원년이라고 개원하여 북위 왕조를 부정하는 깃발을 높이 내걸었다. 육진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이 반란은 곧 육진 전체에서, 동으로는 요서에까지, 서로는 감숙에까지 이르는 장성지대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또한, 감숙 동남부에서 섬서에 걸쳐 저, 강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파육한 발릉의 20만 반란군은 북위의 토벌군과 여기에 협력한 유연족 군대에게 패하여 일단 중국 북위에 항복하고, 하북성 일대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북진의 두락주杜洛周와 갈영葛榮 등의 인솔하에 또다시 하북 일원을 반란으로 몰아넣고 점차 남하하였다.


이처럼 북변의 국경지대에서 발발한 반란이 곧 장성지대 전역에서 화북 내부로까지 파급된 것은, 화북 각지에 잔존한 진 또는 주로 전환된 곳에도 잔존해 있던 주군의 병사들이 북방 6진의 진민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어 그 반란에 동조하였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진민은 일반 주군의 민과 구별되어 군적에 편입되고, 진성에 소속된 민이라는 뜻에서 성민城民이라고 불렸는데, 주에서도 군적에 편입된 성민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니가와 미치오가 사서의 기록에서 성민이 존재한 주州를 추출하여 나타낸 지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6진의 반란(육진의 난)은 성민 반란이라는 형식으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성민의 소재지로 밝혀진 주[북위 말기 무능한 호태후] 성민의 소재지로 밝혀진 주


중국 북위 제국의 기둥이어야 할 지방군의 이러한 대규모 반란에 대하여 낙양 정부는 완전히 무력했다. 게다가 동란의 절정기에도 궁정 내부의 다툼은 그치지 않아 호태후 일파가 효명제 일파가 맹렬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계호족稽胡族의 이주영爾朱榮이 8천 호 이상의 부락민을 거느리고 목장에 수만 마리의 말을 소유하는 추장으로서 수용(산서성 근주시) 일대에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북위 제국은 일찍이 자신들 선비족 부락은 일찍이 해산하였으나 다른 계통의 북인 부족에 대해서는 부락 해산을 강요하지 않았다. 즉 영민추장領民酋長이라는 이름으로 부락민을 세습 통할하게 하되 북위 정부와는 조공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필요할 때 종군하도록 하였다.


근위군 이외의 지방군이 모두 동요하고 있을 때 북위 정부로서는 이 이주영의 세력을 경계하면서도 그에게 원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이주영은 중국 북위 황실을 손아귀에 쥠)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쇠퇴하는 중국 북위와 무능한 호태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