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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21. 02:30

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중국 화북 지방, 동부의 흥망

화북 동반부의 옛 전영 영내에서는 384년 모용수가 연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이윽고 중산中山(하북성 정현)을 수도로 삼고 제위에 올랐다. 이를 전연과 구별하여 후연이라고 한다.


또 모용수(전진 부견에게 중용)의 독립을 계기로 하여 옛 전연의 황제 모용위의 동생들이 장안의 동쪽과 산서성 남부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이에 호응하고자 한 모용위가 부견에게 살해당한 뒤 동생 가운데 한 명인 모용충이 황제를 칭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이 세력은 서연西燕이라 한다.


중국 화북 지방의 서연은 부견으로부터 수도 장안을 빼앗았으나 관중으로 강제 이주되어 있던 선비족이 그 세력의 주체였고 그들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장안을 포기하고 산서성 동남부의 장자현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서연은 이미 동쪽에서 독립해 있던 모용수와의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충분하였고, 그 후 394년에는 후연에게 병합당했다.

이후 후연은 남쪽으로는 황하를 건너 산동성 각지를 동진으로부터 탈환하여 옛 전연의 영역 대부분을 회복하고, 서북쪽의 북위와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396년 모용수가 죽자 종실 사이에 불화가 표면화되었고, 북위가 남진을 개시하여 산서성에서 하북, 하남으로 진출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인 397년 후연 황제 모용보는 수도 중산을 탈출하여 북쪽에 있는 옛 수도 용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좀더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409년에 한인인 풍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이 한인 풍씨의 나라가 북연이다.


397년 중국 화북 지방의 북위에 대공세로 후연의 여러 군단은 각지로 나뉘어졌는데, 그중에서 남쪽의 업에 주둔해 있던 모용덕은 북위군에게 밀려 황하 남쪽 활대(하남성 치현)로 옮기고, 그곳에서 그는 398년에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를 남연이라고 부른다. (저족 부견의 전진 멸망 이후 4개의 연나라가 세워짐)


남연은 산동성 방면을 제압하고 광고(산동성 익도현 서북쪽)를 수도로 삼았다. 모용덕은 400년에 제위에 올랐으며 409년 그의 아들 모용초가 제위에 올랐을 때 동진의 실력자 유유의 군에게 남연은 멸망당하였다.


이리하여 5세기 초에는 화북 동반부의 옛 전연 영내는 대개 북위의 지배하로 들어가고 한편, 실질적으로는 유유가 이끈 동진 세력도 또한 황하의 남쪽까지 북으로 그 세력을 크게 뻗쳤다.


위진남북조 서연 후연 남연 북연의 영역[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시대 서연, 후연, 남연, 북연의 영역


중국 화북 지방, 서부의 흥망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때 장안을 탈취한 모용충 등의 서연 세력은 동쪽인 산서성 남부로 이동해 갔다. 그리고 그후 관중 일대를 제압한 중심 세력은 전진 화제 부견을 죽인 강족 요장이 세운 후진後秦이었다. (요장은 전진 황제 부견을 살해)


요장은 원래 선비족인 모용수와 마찬가지로 부견을 섬긴 장군으로, 383년 전진의 대군이 동진을 습격했을 때는 부견에게 중용되어 사천성 방면의 군총사령관이라는 중직에 있었다.

패전으로 인한 전진제국 해체에, 그는 선비족의 독립을 노린 모용수와 마찬가지로 강족의 독립운동을 단행하였다. 요장은 부견을 죽인 뒤 386년 모용충이 포기한 장안에 들어가 제위에 올랐으나, 요장이 명군 부견을 노골적으로 배신하였기 때문에 저족을 중심으로 하는 부씨 세력의 저항이 매우 완강했다.


그는 사투를 되풀이하며 점차 그들을 압박하였으나 치세중에는 결코 이들의 저항을 근절 시킬 수 없었다.


위진남북조 비수지전 일러스트[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시대 일대의 사건, 비수대전.


394년 제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 요흥은 전진의 잔존세력을 무너뜨리고 관중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내정의 정비에 노력했다.


이리하여 국력을 충실히 한 뒤, 후진은 서쪽을 향하여 국위를 떨쳐 나갔다. 400년에는 감숙성 동남쪽에 자립해 있던 선비족 걸복씨의 서진秦을 항복시키고, 403년에는 하서 회랑지대에 저족이 세운 후량後梁을 무너뜨려 화북 서부의 강국으로 대두하였다. 그 결과 그 유명한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장안에 들어와 불교가 흥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후진의 권위와 평화도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서쪽의 감숙성 방면에서는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독립해 있던 한인 이李씨의 서량을 비롯하여,

선비족 독발씨의 남량이나 흉노 저거씨의 북량,

409년에는 후진에서 다시 독립한 선비 걸복씨의 서진秦,

게다가 유목민의 토욕혼까지 가세하여 서로 뒤엉킨 채 세력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후진은 가장 가까운 서진의 진압에조차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가 북방의 오르도스에서는 흉노족 혁련발발의 하夏나라가 흥기하여 압력을 가하였고, 동으로는 화북 중원을 제압한 북위나 남으로는 이미 동진의 사실상의 지도자가 된 유유라고 하는 거대한 여러 세력에도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진남북조 화북 서부의 영역[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지도


416년 요흥이 죽자 5호의 여러 나라가 항상 겪었던 내부 혼란이 후진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후진을 노리고, 매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짐승을 습격하듯이 주변의 여러 나라가 후진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가운데 417년 첫 번째로 장안에 들어와 이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동진의 유유였다. 그러나 겨우 주둔군만 남겨놓고 강남으로 돌아가자, 혁련발발이 곧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동진의 주둔군을 몰아내고 다음 해 418에 장안에서 제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화북 서부는 관중 일대를 제압한 하나라와 414년에 남량을 무너뜨린 서진과 420년에 서량을 부너뜨린 북량이라는 세 나라가 남게 된다.


부견이 멸망하게 된 비수의 유적지1[중국 화북 지방] 부견이 멸망하게 된 비수의 유적지1


부견이 멸망하게 된 비수의 유적지2[중국 화북 지방] 부견이 멸망하게 된 비수의 유적지2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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