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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송나라와 제나라 교체배경 (위진남북조 시대 송문제, 소도성)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3. 02:00

남조 송나라와 제나라 교체배경 (위진남북조 시대 송문제, 소도성)


송나라 문제가 무인 심경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백한 지식층의 북벌론을 채용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문제 일대는 어쨌든 문치로 기운 시대였다. 그러나 유씨 집안에 잠재한 무인의 피 혹은 무인이 가지는 억제하기 어려운 권력욕의 불길은 5세기 후반(황족의 할거, 제나라 고제 할거)에 들어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453년 송나라 문제는 황태자에게 암살되었다. 친위군을 장악한 황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황족이나 그 밖의 사람들을 계속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그러다가 강주(강서성 구강현)의 군단장으로 있던 황자 유준駿이 제일 먼저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달려가 황태자의 친위군을 혁파하고 이 폭거를 분쇄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앙갚음한 것이다. (이는 제나라에서도 반복된다)


효무제가 된 유준(재위 453~464)은 황태자와 그의 네 아들 및 그와 한편이 된 형과 그 아들 세 명을 죽여 머리와 몸통을 따로따로 옥문에 내걸더니 다시 양자강에 던지게 하였다.


남조 송무제 초기의 정릉 유적1[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송무제 유적지


남조 송무제 초기의 정릉 유적2[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송무제 유적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이 형의 일족을 모두 죽인 것이다. 황족 간에 시기심과 의심이 퍼지고, 의심은 의심을 낳아 반란으로 이어졌다. 반란의 두려움은 황제를 더욱 불안케 하여 쓸모없는 피를 계속 흘렸다.


한 차례 시기와 의심에 빠진 효무제는 황족의 반란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심스러운 형제와 친척을 계속해서 죽음으로 내몰았다. 피에 사로잡힌 권력자는 효무제만이 아니다.

뒤를 이은 전폐제(재위 464~465)도 그랬지만, 그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명제(재위 465~472)죽은 형 효무제의 아들을 열여섯이나 죽였다. 효무제에게는 아직 열두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이들은 그다음의 후폐제(재위 472~477)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순제(재위 477~479)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유씨 일족은 송나라를 대체한 소도성, 즉 남조 제나라 왕조의 창건자 고제高帝에 의하여 완전히 사라져 갔다.


아아, 이제 두 번 다시 왕가에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송나라의 한 왕자가 내뱉은 이 비통한 외침은 권력의 가문에 태어난 자의 슬픔을 대변한다. 송나라의 멸망은 우선 이러한 황족 내부의 피로 물든 참국에 기인한다.


남조 송무제 초기의 정릉 유적3[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송무제 유적지


그사이에 뻗어 올라오고 있는 한미한 가문 출신 무장의 힘이 증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심경지는 효무제 때 이미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전폐제 때는 최고의 관위에 올라 정치에도 큰 발언권을 갖고 있었으나 의심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동족을 신용할 수 없게 된 황제가 다른 성씨의 무장을 신임하고 그로 인해 다른 성씨의 무장이 이윽고 실권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명제에게 신임을 받은 소도성이 드디어 그 열매를 손에 넣었다.


유씨 일족을 모조리 죽여 버린 소도성은 자기 아들인 소색, 즉 제나라의 무제에게 유씨 일족의 전철을 밟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였다. 이 주의는 무제에게만은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소도성의 조카인 소란이 명제가 되었을 때, 피의 참극은 유씨에 못지않을 정도로 또다시 일어난다.

소도성의 자손은 계속해서 끌려갔다. 아기는 물론 유모도 함께 끌려갔다. 불교 신자였던 명제는 향을 피우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미 독약 조제의 명령이 떨어지고 관이 수십 개씩 준비되었다. 밤이 이슥해지고 관뚜껑이 계속해서 닫혀 나갔다. 명제가 향을 피우면서 눈물을 흘린 날은 반드시 그 날 밤 누군가 죽어 나갔다.


5세기 후반을 피로 물들인 이 왕실의 참극은 중국 역사에서도 좀 비정상적이다. 권력자는 많든 적든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품기 마련이다. 빼앗길 염려가 있는 인물을 시기하고 의심도 한다.


오랜시간 남조의 수도였던 금릉[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오랜시간 남조의 수도였던 금릉


원래 시기와 의심이란 자기 권력의 불완전에 비례하여 증대하는 것이다. 송나라, 제나라 군사 정권에서 유력한 군단을 장악한 것은 대부분 황족이었다. 그 안에서 황제는 다른 황족보다 비교적 큰 무력을 장악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틈만 나면 형제라 하더라도 지방의 군단을 이끌고 공격해 올 수 있고, 수도에 사는 황족도 서로 내통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무력집단이 할거하는 봉건시대에는 이런 권력을 향한 헛된 집념과 시기와 의심이 섞인 비극이 일어나기 쉬운 것이다. 5세기 후반은 소위 중국의 맥베스 시대였다.


권력자를 그처럼 불안정한 상황으로 몰고 간 배경에는 시대의 큰 흐름이 있었다. 미천한 신분을 박차고 올라오려는 사람들의 힘이 사회의 곳곳에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조 시대 기와1[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남조 시대 기와1


중앙정부의 측근에는 물론 지방 군부에서도 그와 같은 밑으로부터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의 군부에 벼슬하던 사람들은 그 장관을 부추겨 중앙으로 진출하게 하고 황제로까지 치켜세움으로써 자신들이 더욱 출세할 기회를 노리기 때문이다.

앞서 계속 언급한 한문寒門 출신 군인들도 이러한 경우였다.


그 밖에 당시의 말로 은행恩倖, 즉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신임을 얻은 무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출현도 5세기 후반의 큰 특징이었다.


ps. 아래는 개인이 소장 중인 남조 시대 기와 유물이라 함.


남조 시대 기와2[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남조 시대 기와2


남조 시대 기와3[위진남북조 송문제와 소도성] 남조 시대 기와3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남조 송나라와 제나라 교체배경 (위진남북조 시대 송문제, 소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