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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남풍(가황후) 아버지 가충의 후처 곽괴 이야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3. 03:00

가남풍(가황후) 아버지 가충의 후처 곽괴 이야기


가충의 후처 곽씨郭(곽괴郭槐, 가남풍(가황후) 어머니)는 투기가 심했다. 여민黎民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어난 지 갓 한 돌이었다. 가충이 밖에서 돌아왔을 때, 유모가 아이를 안고 정원에 있었는데, 아이가 가충을 보고 좋아서 뛰자, 가충이 유모에게 다가가서 유모 손안에 있는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곽씨는 이 모습을 멀리 보고 가충이 유모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그녀를 죽여 버렸다.

아이는 슬픔 속에서 유모를 그리며 울었고, 다른 젖을 먹지 않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곽씨는 그 후 끝내 아들을 낳지 못했다.


유효표의 주.

진제공찬晉諸公寶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곽씨는 바로 가황후賈皇后(가남풍)의 모친이다. 성품이 고상했으며, 가황후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서 민회태자愍懷太子(사마휼司馬遹)를 몹시 걱정하고 아끼면서 늘 그를 격려했다. 임종할 때, 가황후에게 태자를 극진히 보살피라고 가르쳤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했다.


한편 조충화趙充華(조찬趙粲)와 가밀賈謐(가충의 친족)의 모친은 가황후의 여동생을 모두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모두 너의 일을 그르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가황후는 그 말을 따를 수 없었으며, 결국에는 주살 당하고 말았다.'


유효표의 첨언

신臣(유효표 자신)이 생각하건대 부창傅瑒의 이 말(진제공찬晉諸公寶)에 따른다면, 곽씨는 현명한 부인이다. 만약 가황후에게 민회태자를 사랑하라고 했다면, 아무리 투기가 심하다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자기 아들을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의 자식을 대할 경우와 자기 자식을 대할 경우가 달랐던 것인가?

아니면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감정이 달랐던 것인가?


가남풍 서진 혜제 황후, 가충 딸[가남풍(가황후) 아버지 가충의 후처 곽괴 이야기]



세설신어 下, 안길환, 명문당

세설신어 흑닉憲錫(여색을 탐닉하여 이성을 잃은 일)편. 3화


곽괴는 이것 말고도 가충이 후처를 얻지 못하게 방해하고 임신한 후처를 사사로이 죽이는 등, 집안에서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가충이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한 건 곽괴 때문입니다. 이런 곽괴의 행동은 훗날 가황후가 황궁에서 했던 일들과 거의 똑같습니다.


팔왕의 난 이전에, 황태후 양씨를 위시한 양씨 일가와 가씨 일가의 충돌을 정치적 결별로 해석한다손 치더라도, 가황후의 투기는 그 정도가 심했죠. 가남풍이 정치는 안전하게 이끌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사생활은 분명 ...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이면엔 어머니 곽괴의 영향도 꽤 크다고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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