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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대토벌작전, 호남의병의 활약과 실패 (항일의병운동)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8. 3. 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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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대토벌작전, 호남의병의 활약과 실패 (항일의병운동)


1908년에 일어난 정미의병을 시작으로 항일 의병 운동이 전국적으로 격렬해집니다.


이에 일본은 종래의 1개 사단과 한국군 해산 때문에 증파된 1개 여단 외에 기병 1개 연대, 보병 2개 연대를 증강했으며, 1908년 말에 전국에 헌병과 보조원 6,600명을 배치, 전국 70개 경찰서에 5,000여 명의 경찰을 배치했습니다. (남한대토벌작전)


전국의 의병 중 지리산 서쪽 전라도 지역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초기 전국 규모대비 약 25%의 비율이던 전라의병(=호남의병)은 1909년 전국대비 45%에 육박하는 등, 전국 의병 활동 중에서도 최고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1909년 1월. 이토를 앞세워, 순종과 전국 순시를 합니다.

경상도와 평안도의 순시에서 70세 이상의 노인, 효자, 열녀에 대해 포상하고, 부산에서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 유림의 정신적 스승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양반, 유림에 대한 회유책입니다.


남한대토벌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2개월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북도 서남부부터, 전라남도 전역을 외각으로부터 포위하고 교반적방법으로 수색, 체포, 살육을 반복한 작전입니다.


교반적방법이란


1. 토벌군을 세분화하여 한정된 지역 안에서 교반적(휘저어 섞음)인 수색을 하고, 

2. 전후좌우로 수차에 걸쳐서 왕복하며, 

3. 기습적 수단으로 적(의병)이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사용 (구체적으로는 촌락을 포위)

4. 면장과 동장을 통해 미리 조사한 남자의 명부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 의심스러운자는 추적하며,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하여, 다시 나타난 의병까지 샅샅이 뒤져 체포, 처형.


특히, 의심스러운 마을은 수십회 수색을 하기도 ...


남한대토벌작전 호남의병[항일의병운동] 일제강점기


이때 남한대토벌작전을 위해 동원된 일본군은 본토에서 온 임시파견대(보병 2개 연대 2,260명)와 제6사단 공병 1소대에 헌병, 경찰이 혼합되었으며, 해안봉쇄를 위해 수뢰정 4척도 파견되었습니다.


의병장은 출신들도 다양하여, 유생부터, 빈농, 평민, 노비까지 있었습니다만, 유생 의병장 중에는 평민 의병장과 공동작전을 꺼려서, 평민들로만 편성된 의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 데일리의 기자인 매켄지가 의병을 찾아 나서며, 했던 말 중 "서울을 제외하면, 전국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독립운동'- F. A 매켄지 중에서)


특히 호남의병들의 활동에 일제가 긴장한 것은 1908년 4월 이후 의병들은 재래의 화승총을 대부분 뇌관식으로 개조를 한 점입니다.


호남의병(남한대토벌작전은 호남의병이 타깃이었음)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더 교묘함이 극에 달했다.

첩보 근무 및 경계방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행동도 더 민첩하여 토벌대를 우롱하고 있다...  중략  ...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 될지 우려스럽다. 

- 일본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 폭도 토벌지'의 기록 중


남한대토벌작선 심남일의병[항일의병운동] 일제강점기


의병들이 목포, 군산을 통해 청국 상인들에게 밀수입하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 조선 폭도 토벌지


이들의 항일 의병 운동과 활동은 매우 활발하여, 


1908년 2월 보성군 파청에서 보성토벌대를 격파한 파청대첩.

1908년 8월 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기병을 격파한 진산대첩.

1909년 3월 일본의 원봉 기병 주둔소를 야습한 원봉사대첩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들이 벌어졌었습니다.


당시 자료집 '심남일 실기'에는 심남일과 호남의병들이 1908년 3월~1909년 5월까지 13차례 접전에서 적 400여 명을 살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파청대첩 진산대첩 남한대토벌작전[항일의병운동] 일제강점기


그리고 1908년 4월 해산되어 상기 명단에는 없지만, 이규홍의병장(275명)은 서양총 100자루, 한식총 200자루, 연환(납총알) 20여두, 화약 10여두로 무장하여,


1907년 가금리전투에서 일본군 27명 사살, 진안, 장수, 용담 등에서 44명 사살,

1908년 진산, 금산에서 일본 정규 기병부대 600명과 싸워 56명 사살을 했으며,

일제는 이규홍에게 현상금 4,000원을 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하여, 130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이 전사 또는 체포되었으며, 일본 측 통계에 의하면, 1907년 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호남의병은 16,700명이며, 부상자는 36,700여 명에 달합니다.


이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하여, 국내에서의 의병은 거의 소멸해 버리고, 의병활동은 만주, 중국, 연해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으로 변합니다.


출처 기억 안남. 제보 부탁.

남한대토벌작전, 호남의병의 활약과 실패 (항일의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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