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통만성이란 거대한 성의 특징 [5호16국 하나라 혁련발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6. 06:37
반응형

통만성이란 거대한 성의 특징 [5호16국 하나라 혁련발발]


5호16국 시대, 혁련발발(하나라 세조(381~425), 흉노 출신으로 후진에서 독립함)은 일정 기간 수도를 두지 않고 유격 전술로 주위의 군소 세력을 병합함으로써 그 병력을 증강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10년 안에 힘을 길러 강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한 후 같이 떠돌아다니면서 유목 생활을 계속할 것을 제의했다. 통만성에 수도를 정한 것은 건국 후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하나라 혁별발발이 통만성에 쏟은 정력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5호16국 시대, 10여 년간 찬 이슬과 혹한, 그리고 눈보라를 맞으면서 신고의 세월을 보내던 혁련발발이 이곳이다!하고 무릎을 치면서 보금자리로 정한 곳이 바로 통만성이었다. 통만이란 명칭에서부터 그의 비원이 담겨 있다.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하겠다는 것이 그 의미다. 통만성의 성문 명칭에서도 우리는 그의 야망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읽을 수 있다.


남문은 송나라의 조공을 받는 문朝宋門이고 동문은 북위를 초납하는 문招魏門이며(북위를 초청하는 문, 즉, 북위 황제를 끌고 들어올 문이란 의미), 서문은 하서회랑 지역의 양나라를 복속시키는 문服凉門이고, 북문은 삭방을 평정하는 문平朔門이다.


혁련발발의 하나라 영토혁련발발의 하나라 영토


그는 413년부터 연인원 10만 명을 동원하여 철옹성을 지었다.


중국의 궁성은 남향이지만 하나라 세조의 궁성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유목 민족의 동쪽 숭배 사상과 관련 있는 것이지만, 눈만 뜨면 숙적 북위(5호16국 시대를 종결한 나라) 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된 것은 아닐까?


통만성을 짓는 총감독은 그를 죽음에서 건져 낸,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해가는 나라를 구해준 은혜)을 입었던 질간아리에게 맡겼다. 성이라고 하나 통상적인 성이 아니었다. 그가 모두 발명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성은 중국 성곽 사상 의미 있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성벽의 견고함이다. 역사서에는 이 성벽을 만들 때, 땅을 쪄서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 고대 국가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축성 방법인 판축법을 채용하긴 했지만, 통만성은 통상의 그것과는 달랐다.

통만성 옆에 있는 마을 이름이 백성자白城子인데 이 성벽은 황토색 토성이 아니라 고대판 콘크리트 성이라 그 빛이 하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컬러판 항공 사진을 보면 두 개의 하얀 큰 테두리를 한 축구장 두 개가 연이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학 감정에 의하면 그 성토의 주성분은 모래, 점토, 그리고 탄산칼슘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증기를 내면서 갑자기 체적이 팽창함으로써 모래와 진흙이 압축되는 공법이다.


하나라 통만성의 궁성 성벽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그 벽을 숫돌로 삼아 칼과 도끼를 갈았다고 한다.


드론으로 촬영한 통만성 유적지드론으로 촬영한 통만성 유적지


드론으로 촬영한 통만성 유적지2드론으로 촬영한 통만성 유적지2


혁련발발을 기록한 5호16국 시대의 역사서는 그를 매우 잔인한 통치자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 축성 과정에서 그가 백성들을 혹사하고,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쌓은 성벽에 송곳이 한 치만 들어가도 그곳을 축조한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그 성벽 속에 같이 넣어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소위 마면馬面이라는 구조다. 이것이 성벽 구조의 하나로 이용된 것은 이 시기로부터 600년이 지난 송대부터라고 하지만, 혁련발발은 이미 이것을 실용화했다. 마면은 성벽 밖으로 말 얼굴처럼 튀어나온 방어용 시설이다. 현재 측정해도 16m나 나와 있다.

마면 간의 평균 거리가 50m였으니 성벽에 근접해 공격해 오는 적들을 화살의 사정권 안에 넣어 공격할 수 있어서 살상률을 매우 높이는 장치였다. 그 마면 아래에는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통만성에는 동성과 연결된 동벽을 제외하고 서, 남, 북벽에 마면이 설치되어 있다. 약간 뒤 시대인 북위 도성 낙양성의 경우 마면이 북서부 최후 군사 거점인 금용성 일부에만 설치되었고, 통만성의 그것과 비교할 때 그 정교함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마면 구조는 중국 성곽 방어 건설상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라는 평가다.


통만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마면통만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마면


통만성 성문의 모습. 내부 옹성이 보인다통만성 성문의 모습. 내부 옹성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옹성甕城의 설치다.


서성에 문이 네 개 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문마다 도가니처럼 반원형의 성벽을 겹으로 둘러쳐 적의 공격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성문의 방어에 완벽을 기하였다.

이런 철옹성을 만들었지만, 하나라 혁련발발의 천하 통일의 원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혁련발발은 5호16국 시대 말기인 425년 통만성 영안전에서 그토록 바라던 북위에 대한 설욕의 꿈을 접은 채 45세에 병사했다.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


정벌이 있을 뿐 전쟁은 없었다는 지적처럼 그의 전략은 한나라의 창업주 유방이나 위나라의 조조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가 있지만, 윗사람을 섬기는 데는 태만하고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는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행동이 가볍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통만성, 쉽게 복원될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상태통만성, 쉽게 복원될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상태


사실 그의 행동들을 보면, 그 두 가지 평가 어느 쪽도 합당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보호자이자 장인이었던 몰혁우를 죽인 비정한 일면이 있는가 하면, 그를 사지에서 구해 준 질간아리를 끝까지 믿고 중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혁련발발이 무척 열심히 살았던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라 세조 혁련발발이 조정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먹는 것도 잊었다는 기록에서처럼 그는 선대가 못 이룬 통일 과업, 아니 하나라의 숙적 북위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이다.


그가 사람을 부림에는 혹독, 잔인했다고 하지만, 혼군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황음荒淫(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그 점을 말해 준다.


출처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삼국 오호십육국 시대, 사계절

통만성이란 거대한 성의 특징 [5호16국 하나라 혁련발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