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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27. 08:17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조선시대 수원 농업[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자급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농업과 상업 생산기반 시설(둔전과 시전)을 마련하였다.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농장인 둔전이 바로 그것이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면서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 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토지 없는 백성들은 둔전을 경작하여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게 하는 한편, 이들이 수확한 양곡으로 화성에 주둔한 장용외영 군사들의 군량미와 급여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저수지와 수차를 이용한 농법 개발과 이앙법의 대대적인 실시로 생산량을 크게 향상해 수원을 농업과 상업(둔전과 시전)의 선진 도시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수원은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 권업모범장-농촌진흥청 등이 설립되어 농업개혁과 인구의 중심지가 되어 농업 1번지로 불렸다.


조선 수원 농업 상업 정조[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만석거


만석거 둔전 팔달문 부재[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둔전


수원화성박물관 조선시대 수원 농업[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둔전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농업 정조[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만석거와 둔전


만석거와 둔전

수원화성의 북쪽에 만들어진 인공 저수지 만석거와 둔전인 대유둔의 모습이다. 만석거에 모인 관개수를 사용하기 위해 만석거 남단 수로 입구에 수갑水閘을 설치하였다.

수갑은 중국 강남지역에 보급된 수문으로 판목板木을 이용하여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다. 이 수갑으로 들어온 관개수는 무자위(수치)를 통해 논으로 흘러들어 모내기에 사용될 수 있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 대왕 수원[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팔달문 부재


조선 정조 대왕 팔달문 만석거 둔전[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팔달문 잡상


팔달문 부재 및 잡상八達門 部材 雜像

수원화성의 남쪽 주출입문인 팔달문은 1795년(정조 19) 5월 20일에 완공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유적의 보존을 위하여 2010년 6월부터 2013년 5월까지 완전 해체보수가 이루어졌다.


보수과정에서 전체 부재의 87%가 재사용 되었고 손상이 심한 부재는 교체되었다. 전시된 부재는 수리과정에서 교체된 부재이며, 잡상 역시 팔달문 지붕을 장식하던 것들이다. 잡상은 궁전이나 전각의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을 새겨 얹는 장식 기와이다.


조심태 수원 농업 발달 상업[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수원의 상업로


조선의 상업중심지 수원

정조 시대에는 상업을 천대 시 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장사와 유통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확대되었다.

조선 전체의 상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했던 정조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 신도시에 한성부와 유사한 시전市廛을 설치하여 조선의 상업중심지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상업 정책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수원 농업 상업 수원화성박물관[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수원 시전 재현품


성내의 시전市廛 설치

시전은 성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용품을 파는 시장의 역할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18세기 말 새롭게 이전된 수원 읍내에도 신풍루 앞, 대로 좌우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입색전 (비단을 파는 상점)

- 어물전 (생선과 과일을 파는 상점)

- 목포전 (무명 모시 목화를 파는 상점)

- 상전 (소금과 일용 잡화를 파는 상점)

- 미곡전 (잡곡과 백미, 담배와 국수를 파는 상점)

- 지혜전 (종이류와 신발을 파는 상점)

- 관곽전 (관을 담는 궤인 곽을 파는 상점)

- 유철전 (놋쇠와 쇠를 다루는 상점)


창룡문 화성행궁 조선시대 수원[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입색전


수원 조선 정조 대왕 수원화성박물관[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미곡전


조선 정조 대왕 수원화성박물관[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유철전 장인


조선 정조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노점

도시 중심부에 상점이 늘어서는 경향은 서울을 비롯한 18세기 지방 대도시의 중요한 변화로, 장안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가로변에 기와집 상점들이 처마를 잇대고 계속 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조가 추구한 대로 왕성한 상업 도시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만석거 둔전 농업개혁[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입색전


수원의 상업발전 정책

좌의정 채제공은 수원의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에서 부호들을 모아 수원에 시전을 짓고 장사를 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수원과 인근 지역에 5일장을 설치하여 신도시를 중심으로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말게 하여 도시를 발전시키자고 하였다. 그러자 해남 지역에 있는 윤선도의 후예들이 수원으로 올라와 상업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거리 모습


수원화성 팔달문 화성행궁[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시전의 십자로


그러던 중 1790년(정조 14) 5월 수원부사 조심태는 보다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는 수원 지역 인물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잘 아는 자를 택해서 자본금을 주고 장사를 하게 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돈 65,000냥을 조달하여 수원 상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신도시가 만들어진 지 불과 2, 3년 만에 전국 최고의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결과 수원에는 성내 시장과 성외 시장이 만들어져 새로운 상업 발전의 모델이 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만석거 둔전 농업개혁[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농업 발전] 상전


시전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길이 새롭게 정비되어, 성내에 교차로인 십자로가 생성되었다.


십자로는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도로와 창룡문과 화성행궁에 이르는 동서로를 의미한다. 이 십자로 주변으로 독점 상점인 시전이 들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수도권 상업 유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