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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첩 (수원화성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2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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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첩 (수원화성박물관)


화성행궁 수원행차 조선 정조[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정조 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 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조선 정조가 수원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관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3차에 걸친 행차를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가 승하한 뒤 1831년(순조 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을 참배하며 행궁에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로 건립되었다.


조선 정조 화성행궁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에 의하여 사라졌다. 뜻있는 지역 시민들과 수원시가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수원에 지은 정조의 궁궐, 화성행궁

행궁은 휴양, 피난, 능행陵幸 등을 위해 국왕이 왕궁을 나왔을 때 임시로 생활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10여 개의 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789년 이후 매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을 찾을 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 화령전[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처음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으로 완성되었으나 수원화성 축성 과정에서 대대적인 증축을 하여 576칸으로 확대되었다. 화성행궁은 국왕이 항상 머무는 정궁正宮인 창덕궁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철저하게 정궁의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조선 정조 대왕이 1804년 국왕의 지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화성행궁에 거처하고자 이를 대비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령전 조심태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화성행궁의 정문 이름은 신풍루新豊樓로 정조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성행궁의 중심 건물은 봉수당奉壽堂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 이곳에서 왕실잔치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마련되었다.


국왕의 행차 시에 사용했던 행사용 건물인 낙남헌에서는 수원의 백성들을 위한 과거시험과 화성 축성의 준공식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낙남헌 앞 담장은 높이 세우지 않고 열어놓아 언제든 백성들이 찾아와 국왕에게 억울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가 돌아가신 후 그의 아들 순조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지어 정전인 운한각雲漢閣에 조선 정조 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해마다 재향을 드렸다.


수원화성 신풍루 봉수당 정조[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

이 지도는 수원화성의 둘레와 군사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지도다. (화성행궁이 아닌 수원화성)

화성성역의궤 권1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의 축성 지침을 따르면 성의 둘레는 3,600보(약 4.2km)로 계획하였는데, 이 지도에서는 3,700보로 100보나 늘어나 있다. 실제 수원화성의 둘레는 4,600보(약 5.7km)로 늘어나 있다.


정조 신풍루 혜경궁 홍씨[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화성행궁 정조 어찰 봉수당[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지도에서 검은색으로 그려진 부분은 이미 쌓은 구역이고, 붉은색으로 그려진 부분은 아직 쌓지 않은 구역이라고 쓰여 있어 축성 중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우측 상단의 표기된 용연정과 동문 사이의 모습은 현재와 가장 많이 다르다. 축성 과정 중에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수정된 곳이 많다. 지도 안쪽에는 성곽의 각 구역을 담당하는 편성군과 인원수도 표시되어 있다. (화성행궁과 관련된 비슷한 자료는 없다. 아쉽지만.)


화성부성조도 정조어찰첩 조심태 화성행궁[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정조어찰첩 正祖御札帖

조선 정조 대왕이 수원화성 축성의 핵심인물인 조심태趙心泰(1740~1799)에게 보낸 어찰 13통을 모은 것이다. 이 어찰들은 대략 조심태가 수원부사로 임명된 1789년부터 장용대장으로 활동하던 179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륭원 조성, 용주사 창건, 수원화성 축성, 장용영 운영 등에 관련한 정조의 직접적인 지시사항과 지대한 관심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신도시 수원 건설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가치가 높다.

수원부사로 부임(화성행궁 건축 이후)한 조심태는 수원부의 읍치를 이전하고 현륭원을 조성하는 일을 현장에서 지휘했고, 용주사를 건설하거나 새로 조성되는 수원부를 육성시키기 위한 방안들을 제시했다.


더욱이 수원화성 축성시에는 1793년 12월 훈련 대장으로서 현장 총감독인 감동당상으로 임명되었고, 몇 달 뒤 수원유수가 되어 축성에 관한 사항을 정조와 긴밀히 논의하였다. 이러한 위치 때문인지 수원화성의 종합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간행의 최고 책임자를 지냈으며, 축성 공로의 시상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었다.


혜경궁 홍씨 화성행궁 조선 정조 대왕[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조선 정조 대왕이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


화성 성역을 어찌 꼭 스스로 감당해야 하겠는가?

대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성역과 관련된 모든 비용은 조속히 방법을 마련하여

트집을 잡으려는 자들이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돈에 관한 사실을 알아보려고 이렇게 편지를 보냈네.

이만 줄인다.

7일.


조선 정조 조심태 화성행궁 수원부[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794년(정조 18)에서 1796년(조선 정조 대왕 20)까지 축조된 수원화성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종합공사보고서이다. 책의 체재는 권수 1권, 본편은 제1권에서 제6권까지로 축성공사와 관련된 내용이며, 부편 3권은 행궁의 증축공사에 대한 내용으로 총 10권 9책이다.


정조 조심태 화성성역의궤[수원화성박물관] 조심태와 화성행궁


성곽 시설물의 도면뿐만 아니라 축성 도구, 재료의 쓰임과 비용, 중앙관리로부터 공사 인부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임금 지급에 대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된 책으로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첩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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