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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 전진 부견의 실패 [현실을 망각한 저족의 영웅]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5.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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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 전진 부견의 실패 [현실을 망각한 저족의 영웅]


위진남북조 시대는 두 가지 정치, 사회의 흐름이 주도한 시대였다. 귀족주의와 종족주의가 그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시대를 귀족사회, 혹은 민족 모순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부견은 당시 사회의 흐름을 완전히 거부했다.


부견은 종실 제왕의 작위부터 강등했다. 왕王을 공公으로 하고, 왕호를 모두 공호로 내렸다. 당연히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법치주의자였다.


통상 법치는 나쁜 것으로 예치 혹은 덕치의 반대 개념으로 파악되지만, 법치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나라가 안정된 시기에는 예치가,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는 법치가 당연하다 생각했다. 문제는 법 적용의 공평, 타당성인데, 부견은 정말 자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했다.

부견은 적극적은 한화 정책을 채용하였다. 사실 오호십육국의 여러 왕조가 단명으로 끝났던 것은 극히 제한된 면에서의 한화 때문이었다. 한화 정책은 한족의 정권 참여 폭을 대폭 넓히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지배 종족이 가진 권력을 한족에게 상당 부분 분양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제한적인 한화 정책은 선진 문화를 섭취하는 데 장애가 된다.

유목 민족의 생활 방식은 농경 민족보다 비교적 단순하므로 정치 문화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전진 황제 부견의 동상[전진 황제 부견의 동상]


그러나 이들이 중원에 진입한 이후 종족 구성이나 사회 계층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따라서 종래의 소박한 정치 문화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드러났다. 한화 정책의 채용은 백성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처였다.


이 시기에는 호, 한 민족 간의 갈등도 문제였지만 호와 호 사이의 모순도 작지 않은 문제였다. 영내의 여러 호족에 대해서도 민족적 편견에 따른 민족 구별 책을 탈피하여 더욱 보편적이고 공평한 정책이 필요했다. 인의와 은신 두 가지가 부견의 이족에 대한 정책 기조였다.


부견은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은 쓰다듬어야 하고 이적과는 화목해야 한다. 천하를 합하여 한 집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갓난아이처럼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의 수장을 잡아와서는 오히려 벼슬을 주고, 원래 그들에게 속했던 부락들을 옮겨서 다시 그 아래 배속시켰다.


배신을 반복하는 이적이라 할지라도 인의로 대하고, 은신으로 회유한다면 결국 하나로 융합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북방을 통일한 전진 부견[전진 북방 통일] 남조 동진


그러나 그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중 하나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전연의 척속으로 모용평과 전공 문제로 불화 관계에 빠진 모용수 부자가 전진으로 망명해 왔다. 최고의 참모 왕맹마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하였지만, 부견은 그를 관군장군으로 임명하더니 경조윤京兆尹(수도권 장관)으로 승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전연의 최후의 황제 모용위를 포로로 장안에 연행한 후 신흥후에 봉하고 읍 5,000호를 주었는가 하면, 모용위의 동생 모용충을 평양태수로 삼고 옛 전연의 왕공 모두에게 관직을 주었다.


중국 게임 전천하의 부견[5호16국 전진 황제 부견]


또 전 구지의 양통을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에, 전량의 장천석을 귀의후에 각각 임명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전진의 군정軍政에 깊이 참여했고, 요장 모용수, 모용위 등은 비수의 전쟁 때 모두 1군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다. 그들이 이끈 군대는 그들이 전진에 멸망 혹은 투항하기 직전에 직접 이끌던 군대였다.

광야를 휘젓는 영웅들을 순치시킬 방법은 인의와 은신뿐이라는 그의 신념은 확실히 약간 도를 넘은 기분이 없지 않다. 부견의 이와 같은 정책은 바로 모든 힘을 모아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야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자칫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는, 사실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들을 초납하여 개별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느리던 부하들을 그대로 고스란히 다스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부견의 조처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는 자가 적지 않았다. "전연이 진을 멸망시킬 것이다"라는 경고였다.


특히 부견은 자기 족속인 저족을 모용시의 나라가 있던 동방 지역에 보내 전후 처리 및 수습 일에 전속시키고 수도 지역은 대신 옛 적군들에게 맡겼다.


부견의 충신 왕맹 초상[전진의 명재상 왕맹]


그의 최측근 참모이며 동생인 부용은 이렇게 경고했었다.


"폐하는 선비, 강, 갈 등을 총애하여 기내(수도 인근)에 살게 하고는 동족은 먼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풍진의 변(군사 반란)이 일어나면 국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읍에는 수만 명의 약한 병사만 남아 있을 뿐이고, 선비, 강, 갈 등은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때 국가의 적이고 우리들의 원수였습니다."


사실, 선비, 강, 갈족이 경기 지역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부견의 이런 정책은 누가 보더라도 과도해 보였다.


이런 이민족 우대 정책에 대해 오른팔 격인 왕맹마저 임종할 때, 선비(모용씨, 특히 모용수)는 결국 대환이 될 것이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상소를 올렸다.

역사를 돌이켜보거나 최근 우리나라 정치가를 보더라도 최고 지배자 가운데 처음에는 명군이었던 자가 후반기에는 갑자기 암군이 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그것은 대개 처음에는 허심납간虛心納諫(넓은 마음으로 신하들의 충고를 주저 없이 받아들임)하다 후반기에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쓸데없는 아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전진 부견의 묘 유적지[전진 황제 부견의 유적지]


부견은 철저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소위 영내의 모든 사람이 감동할 수 있는 감동의 정치를 하면 그들은 자연히 귀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통일을 이루는 길은 무조건 힘에 호소하기보다 이처럼 군주 자신이 덕을 쌓고 화합 정책을 펴 국력을 증강하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인가. 그는 중원 한족 출신 이상으로 자주 중국의 위엄왕도의 교화를 강조했다. 부견이 그런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은 그것이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신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진정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출처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삼국 오호십육국 시대, 박한제, 사계절

이상주의자 전진 부견의 실패 [현실을 망각한 저족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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