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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의 무주혁명, 측천무후 최고의 업적 (당나라 -> 주나라)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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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의 무주혁명, 측천무후 최고의 업적 (당나라 -> 주나라)


당나라 홍도 원년(683년)에 고종이 56세로 세상을 뜨면서 태자를 즉위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의 셋째 아들)은 즉위하여 호를 중종이라 하고, 무측천을 황태후로 존대(무주혁명의 빌미)하였으며 배염을 재상에 임명했다. 한번은 중종이 배염 앞에서 자기의 장인 위현정을 재상으로 추천하자 배염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당나라 중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 해도 큰일 날 것이 없다."

이 말이 무측천의 귀에 들어가자 중종은 황제가 된 지 두 달 남짓 만에 쫓겨나 노릉왕으로 강등되었다. (측천무후는 무주혁명을 위해 권력자들을 이렇게 제거했다)


중종을 폐위한 무측천은 넷째 아들 이단을 황위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예종이다. 무측천은 예종을 정사에 참여시키지 않고 자신이 조정을 장악하고서 왕조를 바꾸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당나라 중종, 무측천의 셋째 아들[당나라 중종, 무측천의 셋째 아들]


그녀는 동도 낙양을 신도神都로 이름을 바꾸어 등극 이후의 수도로 삼으려 했고, 무씨 집안의 5대 선조를 추존하여 당나라의 백관 명칭으로 이름을 붙였다.

 

무주혁명武周革命 (주나라가 당나라를 대체한 것을 의미)

바로 이때, 무측천에 의해 유주에 좌천되었던 유주사마 서경업 등이 공개적으로 측천무후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들은 10만의 군사를 모으고 낙빈왕이 '무측천을 토벌하는 격문'을 작성해 천하에 무측천 토벌의 의지를 알렸다. 그러나 서경업 등의 군사작전에 착오가 생겨 군사를 일으킨 지 40일이 못 되어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무측천의 조카 무승사[무측천의 조카 무승사]


반란을 평정하는 사이에 재상 배염은 무측천에게 예종에게 권력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무측천은 그를 처형하고 재상 집단의 대폭적인 재구성에 간여한다. 또한, 심혈을 기울여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하여 자신이 황위에 오르기 위한 여론을 조성했다.

조카 무승사는 옹주 사람 강동태를 시켜,


"성모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제왕의 업을 영원히 이을 것이다."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흰 돌을 바치게 했다.


강동태는 이 돌을 낙수에서 얻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물론 무승사가 지시한 일이었다. 무측천은 이돌을 '보도寶圖'라 이름 짓고 직접 낙수에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기뻐하며 말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예종도 이 기회에 측천무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성모신황聖母神皇'이라는 존호를 바치고 국가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신황 옥새를 제작했다.


측천무후의 무주혁명[측천무후의 무주혁명]


'신황'이라는 칭호는 무측천이 정식으로 황제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무주혁명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이당 종실은 강산의 성씨가 바뀌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없었다.


수공 4년(688년), 당나라 고조의 11번째 아들 한왕 이원가가 '중종을 다시 맞이한다'는 명분으로 먼저 군대를 일으키자 다른 일부 이당 종친들도 속속 가담했다. 무측천은 침착하고 결단력 있게 군사를 배치하고 반항을 진압해 나갔다.

 

두 번의 무장반란이 진압되자 측천무후의 황위를 향한 길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영창 원년(689년) 정월 초하루 날, 설회의가 건설한 만상신궁萬象神宮(명당)에서 성대한 제사가 거행되었다. 무측천은 당당하게 초헌初獻을 올렸고 황제와 황태자는 단지 조용히 뒤를 따라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바쳤다. 이러한 중요한 의식에서 무측천이 '초헌'을 올린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려준 셈이다.


초헌, 아헌, 종헌

제사를 지낼 때, 제주가 손님을 맞이하며 술도 가장 먼저 올린다.

아헌과 종헌은 두 번째, 세 번째로 술을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즉, 측천무후가 초헌을 올린 것은 집안의 가장 높은 사람이거나,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무주혁명을 이제 실현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에 권진勸進(신하가 제위에 오르도록 권하는 행위)의 연극을 꾸며야 했다.


드라마 속의 측천무후[드라마 속의 측천무후]


그래서 어사 부유예는 관중의 백성 900명을 거느리고 와서 당나라의 국호를 주나라로 교체할 것을 상주했고, 문무백관, 스님, 도사 등 6만여 명도 상소를 올려 당나라를 주나라周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각지에서는 왕조 교체의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을 보고했다. 예종도 급히 자신에게 무씨 성을 하사해 달라고 간청하여 무씨가 단독으로 군주임을 인정했다.


천수 원년(690년) 중양절(9월 9일), 67세의 측천무후는 천문루에 올라 대주 왕조가 정식으로 성립되었음을 선포했다. 이로써 무측천은 꿈에도 바라던 진정한 '여황제'가 되었다.


그녀는 '신성황제'라 자칭하고 11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했으며 깃발을 붉은색으로 바꾸고 천수로 개원하여 하늘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받았음을 천하에 알렸다.

이로부터 무주왕조는 이씨 당나라 왕조를 15년 동안 대체했다.

역사에서 주나라가 당나라를 대체한 사건을 '무주혁명'이라 한다.


출처 - 천추흥망, 수당나라, 따뜻한손, 거지엔슝, 쑹창빈, 이지연

무측천의 무주혁명, 측천무후 최고의 업적 (당나라 -> 주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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