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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가 아끼던 조조의 업도를 불태우다 (삼국지 업성)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 03:00

수문제가 아끼던 조조의 업도를 불태우다 (삼국지 업성)


린펀시 인근에서 추진되는 업도 복원 계획[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조조 이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370여 년간이나 영화를 누렸던 업도는 수문제 때문에 옥수수밭에 묻혀있게 되었다.


조조의 업도가 훼손된 것은 그곳을 근거지로 한 실력자가 패배했기 때문이다. 수나라가 건국할 즈음인 580년 업도는 당시 실력자인 양견(수문제)의 지시로 불태워짐으로써 도시의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양견의 찬탈을 반대하던 상주총관 울지행이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승리자 양견은 조조가 세웠던 업성을 불태우고 그곳 주민들을 남쪽 안양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수문제 이전 시대) 서방의 북주와 화북 통일을 다투던 북제가 망한 것이 577년이었으니 바로 3년 후의 일이다. 업도인은 망국에다 반란 측에 동조한 백성이라는 죄목을 다시 둘러쓰게 된 것이다. 만약 북제가 북주를 이겼다면 오늘날 업도의 모습은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제가 망한 후 그와 경쟁 관계였던 북주의 수도 장안으로 모든 교통 선이 집결되었다. (수문제 이전 시대)

수隨 대에 만들어진 대운하는 낙양을 거쳐 장안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고구려 침략을 위해 뚫은 영제거라는 운하마저 이전 수륙 교통의 중심지였던 (조조가 세웠던) 업도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계성薊城(지금의 북경)으로 곧장 치달리게 되었다.


북제 시대 업도의 영화는 낙양의 희생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업도 한단시 유적[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북제의 창업자 고환은 북위를 넘어뜨리고 수도를 낙양에서 업도로 옮기고(534년), 대량의 인구를 업도로 이주시켰다. 낙양이 버려진 뒤 13년, 낙양인의 한 사람인 양현지는 낙양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다시 낙양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낙양의 파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문제 이전 시대이며 조조가 업도를 세우기 이전의 시대를 기리며)


업도 한단시 유적2[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城郭崩毁 宫室倾覆) 성곽은 무너지고 궁실은 넘어지고

(寺观灰烬 庙塔丘墟) 사원은 불타 버리고 묘탑은 폐허가 되었다.

(墙坡蒿艾 (巷罗荆棘) 궁정 벽은 쑥으로 덮여있고 거리는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野兽穴于荒阶) 들짐승은 무너진 계단에 구멍을 파 살고 있고

(山鸟巢于庭树) 산새는 정원수에 깃을 튼다

(游儿牧竖 踯躅于九逵) 할 일 없는 애나 목동들은 옛 대로를 배회하고

(农夫耕老 艺黍于双阙) 농부나 늙은이들은 궁성 문에서 기장을 베고 있다


(麦秀之感 非独殷墟) '맥수의 탄식'은 은나라의 옛 터전을 돌아본 고인(箕子기자)만의 것이 아니며

(黍离之悲 信哉周室) '기장밭에서 느낀 서글픔'은 진실로 주나라의 멸망을 실감케 하는구나


업도 한단시 유적33[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폐허가 된 고도 낙양의 모습을 바라보고 비감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던 양현지마저도 그 화려한 업도가 그렇게까지 다시 폐허로 변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조조는 실제로 낙양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


하늘은 갚아 주기를 즐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20년도 못 되어 또다시 그 파망의 설움을 업도 인들이 되받을 줄이야 당시 사람 가운데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수문제 이전 시대)


하늘은 업도에 대해 절대 관대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차례 장수를 범람시켜 이전의 유적 대부분을 매몰시켜 버렸다. 하늘은 100평도 안 되는 삼대의 대기(조조 이후 삼대)만을 후세까지 남겨 인간들이 남긴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이정표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이다.


업도 한단시 유적4[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황성 옛터는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그 광활한 평야의 옥수수밭에는 마침 한여름의 햇살을 받고 찰옥수수 알이 살쪄 가고 있었다.


업도가 영화를 누렸던 시절에는 그 담당 면적이 매우 넓었다. 경광철도 너머 태항산맥 동록의 구릉 지대에는 아직도 수많은 묘군墓群이 널려져 있다. (수문제 이전 시대)

이들 묘는 천몇백 년 동안 이른바 조조의 가짜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조조는 낙양에서 죽었지만, 이곳에 옮겨 묻히기를 바랐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되는 조조는 죽으면서 몇 가지 유언을 남겼다.


삼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하였던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업도 한단시 유적5[한단시 업도 유적] 삼국지 조조의 성과


첫째, 업도의 동작대 위에 휘장을 치고 그 아래 8척 길이의 상 위에 아침저녁 시간에 맞게 말린 고기와 반찬을 차려 놓고, 매월 1일과 15일에 자기의 후비와 기녀들이 모두 참가하는 가무를 열어 자기를 즐겁게 하라는 것, (수문제 이전 시대)


둘째, 자손들은 자주 동작대에 올라 그가 잠들어 있는 서릉을 바라보라는 당부가 그것이다. 이 동작대 기녀고사는 후세 시인들에게 오랫동안 시의 소재로 되풀이 쓰였다는 점에서 조조는 역시 범인이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멋쟁이(?)로 인식되기도 했다.


출처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박한제, 사계절

수문제가 아끼던 조조의 업도를 불태우다 (삼국지 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