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청주의 백제, 신라 고분군과 정북동 토성 제작 과정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7. 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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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신봉동 고분군


신봉동 고분군은 청도 도심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무심천 서쪽 낮은 구릉에 있다. 해발 100m의 명심산明心山 정상부와 사방으로 뻗은 산기슭을 따라 분포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움무덤土壙墓 등 다양한 무덤을 조사하였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철제 무기, 마구류, 장신구류 등이며, 주로 5세기 전후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이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1982년 3월 고분의 존재가 알려진 뒤 1차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7년에는 고분군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7차례 발굴조사를 하여 돌방무덤 4기와 돌덧널무덤 3기, 덧널무덤, 널무덤, 움무덤 등 320여 기, 구덩유구 49기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 충남 부여백제금동대향로, 충남 부여


특히 2013년 7차 조사에서는 돌방무덤 가까이에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돌덧널무덤을 처음 확인하였다.


신봉동 고분군은 대체로 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돌방무덤이 분포하고, 돌방무덤 아래로 크고 깊은 덧널무덤이 능선을 따라 자리한다. 그 아래로 크고 작은 움무덤이 촘촘히 어우러져 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움무덤의 크기가 작아지며, 능선의 가장 아래쪽에는 작은 움무덤과 구덩유구가 뒤섞여 있다. 이들 가운데 돌방무덤은 여러 무덤 중 가장 늦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백제 권역 최대의 고분 밀집지역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 고분군은 5세기 무렵에 집중 조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문헌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백제의 활발한 군사적, 대외적 활동을 증명하는 유적으로서 가치가 높다.


청주의 신라 무덤과 서원경


신라는 5세기 후반 보은(삼년산성)과 청원 문의(양성산성)에 진출한 후 청주를 경계로 하여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청원 미천리 유적에서는 석곽묘와 함께 많은 신라 유물들이 출토되어 6세기를 중심으로 우리 지역 가까이 진출하여 자리 잡은 신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6세기 중엽 이후 (진흥왕 때) 청주에 진출한 신라는 점차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는데, 청주 용담동, 명암동, 신봉동, 금천동 등지에서 발견된 신라 무덤을 통해 당시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신라는 685년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하여 옛 백제 지역에 대한 통치 조직을 갖추었다. 686년 세워진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삼국 통합 직후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주, 신라 굽단지와 뚜껑있는 굽접시청주, 신라 굽단지와 뚜껑있는 굽접시


충북의 신라 병충북의 신라 병


신라 뚜껑있는 굽접시, 청주신라 뚜껑있는 굽접시, 청주


신라의 굽잔, 청주신라의 굽잔, 청주


계량기로서의 손잡이 잔


백제 토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손잡이 잔이다. 손잡이 잔은 가야는 물론 신라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백제의 것이 두드러진다.


손잡이 잔은 말머리 등 장식의 손잡이의 모양은 물론 토기 표면의 다양한 문양이 주목되어 왔다. 손잡이 잔은 물과 같은 액체를 담는 용기로 이해됐으나 최근 곡식 등의 양을 재는 계량기로써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손잡이 잔의 용적은 약 2,400cc를 1말斗로 하였고, 이것은 바리의 평균 용적인 600cc의 네 배가 되는 양이다.


백제 손잡이잔, 용량 2000cc백제 손잡이잔, 용량 2000cc


백제 손잡이잔, 용량 600cc백제 손잡이잔, 용량 600cc


신봉동 움집터 (발굴조사 모습)


신봉동에서는 모두 26기의 백제 시대 움집터가 발굴 조사되었다. 대체로 길이 5.0 X 4.0 ~ 5.7m, 깊이 0.3~0.6m 크기의 장방형長方形이다. 긴 벽 쪽으로는 기둥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일부는 점토를 다져 만든 화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화덕 일부는 부뚜막의 기능을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에선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신봉동 움집터 화덕신봉동 움집터 화덕


정북동 토성 (제작과정)


정북동 토성의 성벽은 별도의 기초基礎가 없이 축조되었다. 성벽은 체성體城과 외피外皮로 나뉘는데 체성은 대략 2.1m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4개 세우고, 외피는 안팎으로 1개씩의 기둥을 세우고 흙을 쌓아 올렸다.


성벽 길이 방향의 나무 기둥은 1.1~1.7m 간격으로 일정하지 않다. 성벽은 약 0.7m 높이마다 나무기둥을 뽑아 올리면서 모래와 펄을 차례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바깥쪽으로는 도랑垓字(해자)을 두어 방어력을 높였다.


정북동 토성 제작과정정북동 토성 제작과정


정북동 토성 복원 모습정북동 토성 복원 모습


판축. 모래와 진흙을 차례로 쌓아 올린 모습판축. 모래와 진흙을 차례로 쌓아 올린 모습


해자. 성벽 바깥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방어력을 높임해자. 성벽 바깥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방어력을 높임


출처 - 청주 백제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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