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금관가야의 성장과 쇠퇴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1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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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제작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삼국지 왜인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방군에서 왜로 갈 때 해안을 따라 바닷길로 가는데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면 구야한국에 이르고, 여기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고, 다시 바다 건너 1천여 리를 더 가면 일지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바다 건너 1천여 리를 더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흔히 대마국은 지금의 대마도, 일지국은 지금의 이키섬壹岐島, 말로국은 큐슈九州 북부의 해안 지역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3세기 중후반경 김해의 구야국이 해상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모두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말에 조영된 덧널무덤이므로, 이 무렵 금관 가야의 교역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금관 가야 세력 범위금관 가야 세력 범위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가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해결해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어렵게 여겨 "금관국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아 지혜가 많다"고 말하고 불러서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한 뒤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모여서 수로왕을 대접하라고 명령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이 주관하였으나 한기부만 지위가 낮은 자가 주관하였다.


수로가 화를 내며 종 탐하리에게 명령해 한기부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가고, 종은 도망해 음즙벌의 우두머리 타추간의 집에 의지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陁鄒가 보내지 않았다. 왕이 화를 내며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고, 실직과 압독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연표대로라면 신라 파사이사금 23년은 기원후 102년에 해당하지만, 신라 상대의 기년 조정방식에 따르면 282년경인 3세기 말에 발생한 사건을 신라 사람들이 각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즙벌국은 지금의 경북 경주시 안강, 실질곡국은 강원도 삼척 일대에 흔히 비정하므로 위의 기록은 한때 동해안 지역의 영토 분쟁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금관가야의 위세가 대단했으며, 신라조차 소속 인물이 살해되었는데도 직접 보복하지 못할 정도로 금관가야의 군사력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4세기에 들어와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자 철을 매개로 한 금관가야의 중국방면 대외교류, 교역이 타격을 입었고 4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가야 지역까지 침공하게 됨으로써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가라 침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14년 조에는 '가을 7월에 바닷가의 8국이 가라를 침공하려고 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령하여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니, 8국의 장군을 공격해 죽이고 잡혀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骨浦=마산, 칠포柒浦 =칠원, 고사포古史浦 =고성, 사물史勿=사천 등 남해안의 8개국이 해상교역 주도권 때문에 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가야 봉황대 유적 - 일제 강점기 조사 모습 (1917년)가야 봉황대 유적 - 일제 강점기 조사 모습 (1917년)


이로 인해 금관가야의 국제적 위상이 상당히 추락했다고 보인다. 같은 책 나해이사금 17년 조 '봄 3월에 가야가 왕자를 (신라로) 보내 볼모로 삼았다'는 기사는 금관가야가 마침내 신라의 통제를 받는 약소국으로 전락한 때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후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532년에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대항하지 않고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고고학적으로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5세기 전반 이후 대형 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등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 사라지며 김해 봉황대유적, 양동리 고분군에서도 위세품이 없고 규모가 작은 무덤들이 조영되는 현상을 찾을 수 있다. 5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예안리 36호 무덤은 금관가야 토기와 신라계 토기가 함께 부장되어 바야흐로 신라의 영향이 거세졌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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