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삼한 속의 변한과 전근대의 인식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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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 또는 삼한三韓이라는 이름은 종족 혹은 지역 명칭으로서 늦어도 3세기 무렵에 이미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중국에서 3세기 전반기에 편찬된 사승의 후한서, 3세기 말엽에 편찬된 진수의 삼국지 등이 대표적인 기록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후 준이 예전에 함부로 왕이라 일컫다가 연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공격받아 빼앗기자 가까운 나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한韓 땅에 살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는데, 그 자손이 끊어졌으나 지금도 한인韓人은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이에 고조선에서 위만이 준왕을 내쫓고 즉위한 해가 기원전 194년이므로 기원전 2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한이 성립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혀있고 남쪽은 왜와 접하는데, 사방 4천 리 정도 된다. 3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삼한의 영역삼한의 영역


이를 1세기 말에 편찬된 한서 조선전의 '진번과 진국이 천자에게 글을 올리려 하는데 조선의 우거왕(?~108BCE)이 막아서 못한다'라는 기록과 맞추어 보면, 진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5세기 중엽에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은 모두 옛날 진국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기록 속의 삼한은 70여 개의 작은 나라로 이루어진 연맹체에 가깝다.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한은 원양국爰襄國부터 초리국楚離國까지 50여 개의 나라가 있었으며,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여 가로서 모두 합해 10여만 호戶였다고 한다.


마한 동쪽에는 진한 12개국이 있고, 그 옆에 변한 또는 변진 12개국이 있어 서로 섞여 살았는데, 큰 나라는 4~5천 가, 작은 나라는 6~7백 가로서 모두 합해 4~5만 호였다고 한다.


변진 12국은 진왕辰王에게 복종하였으며, 진왕은 대대로 마한 사람이 물려받았다. 진왕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을 다스린다는 기록도 있다.


변한의 영역변한의 영역


변진 12개국 이름은 미리미동국彌理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낙노국樂奴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등이다.


대게 미리미동국은 지금의 밀양, 접도국은 칠원, 고자미동국은 고성, 반로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비정하며, 진한은 낙동강 동쪽, 변한은 낙동강 서쪽으로 지역을 나눠 보기도 한다.


12개국 외에도 작은 마을마다 우두머리가 있어 큰 곳은 신지라고 불렀으며, 그다음은 험측險側, 그 다음은 번예樊濊,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다음은 읍차邑借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 따르면, 변한 사람들은 오곡과 벼농사를 짓고 누에치기와 비단-베 짜기를 했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에서 장례를 치를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였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철을 만들어서 한, 예, 왜와 낙랑, 대방에 팔았는데, 철이 화폐 역할을 하였고, 무기는 마한과 같았으며, 보병 전투를 잘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였고, 왜와 가까운 지역 사람들은 문신했다고 한다.


창원 다호리고분군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납작도끼, 칠초세형동검, 칠기 붓, 전한대 청동거울)


변한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은 경남 창원의 다호리茶戶里 유적, 김해 봉황동 회현리의 조개무지 등이다. 다호리에서는 70여 기의 무덤이 발굴조사 되었는데, 대다수가 널무덤이다. 


특히 다호리 1호 무덤은 통나무 관 아래에 껴묻거리 구동이가 있는 기원전 1세기경의 무덤으로서 동검, 고리자루큰칼, 납작도끼 등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농공구류, 칠기 붓과 칠기 그릇들이 다수 출토되어, 상당한 권력자가 묻혔음을 알 수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 내 조개무지 출토 유물

(봉황동에서 출토된 각종 패류, 골기, 왕망 정권의 엽전)


또한, 후기 민무늬토기와 고식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시대에 따른 토기의 변화상을 보여주며, 이 밖에 전한대前漢代 청동거울과 화폐, 일본 야요이 토기 등도 출토되어 이 지역의 대외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려준다.


한편 봉황동 유적의 회현리 조개무지는 이곳이 변한 시기에 바닷가였음을 시사한다. 도끼, 손칼 등의 철기와 뼈화살촉, 뼈바늘, 뼈송곳 등의 골기骨器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훗날 신라 토기로 발전한 두드림무늬 토기도 출토되었다.


창원 다호리고분군 출토 유물

(다호리에서 출토된 전한대 화폐, 삼각형 점토대토기와 뚜껑, 조합식 쇠뿔 손잡이 목 항아리)


교역을 시사하는 유물로는 1세기경 중국의 왕망 정권이 발행한 엽전 1개와 유리로 만든 대추모양 장식구슬이 있다. 불에 탄 쌀도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창원 다호리 쪽의 세력이 선진적이었으나 나중에는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김해 봉황동 쪽의 세력이 우세해졌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된다.



전근대의 삼한 인식


가야는 마한, 진한, 변한 삼한 가운데 변한이 발전한 나라들이다. 그런데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 뒤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668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삼한을 삼국과 동일시하였다.


통일신라 - 9세기 후반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857~?)(당나라)태사시중께 올리는 글에서 삼한이 곧 삼국이라면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통일 이전부터 당나라에서 나타난 것이며, 당 문화가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전체에 퍼졌다. 6세기에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자 변한과 가야의 연결 고리가 사라지고, 대신 수, 당과 대립하던 고구려를 삼한에 포함한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통일 신라는 이를 받아들여 진한의 계승자로서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을 강조하였으며, 마한과 변한의 계승자를 고구려와 백제로 간주하였다.


고운집 태사시중께 올리는 글고운집 태사시중께 올리는 글


고려 -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은 한 집안이 되었고 백성은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삼한=삼국' 인식이 고려시대에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된 것이다.


조선 -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이전의 인식을 수용하였으나, 후기에 들어 국학과 역사학이 발전하고 실학과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자 자연스럽게 가야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먼저 한백겸이 1615년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의 역사 지리적 위치를 비정하였고, 뒤이어 유형원, 신경준 등이 진辰-삼마한三馬韓-백제, 신라, 가야의 계승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증적 역사연구가 더욱 깊어짐으로써 삼한정통론이 수립되었고, 이익이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마한, 진한, 변한의 영속관계를 강조한 마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이후 정약용이 엄밀한 고증을 통해 지금의 통설과 같은 삼한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이병도, 천관우 등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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