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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진 불교의 부작용 (위진남북조) 효무제 사마요의 잘못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24. 04:30

중국 동진 불교의 부작용 (위진남북조) 효무제 사마요의 잘못


효무제 사마창명 중국동진[위진남북조 중국 동진] 효무제 사마요


5호16국시기의 계속되는 혼란은 불교의 전파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것이 중국 동진의 효무제 태원 14년(389년)에 이르면 당시 황제인 효무제 사마창명司馬昌明(중국 동진 황제 효무제 사마요)이 불교를 독신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효무제 사마요는 14세 때에 황제가 되었으나 나이가 들어서 정사를 친히 다스리게 되자, 얼마 안 가서 술과 여자에 빠져 사무를 낭야왕琅耶武王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사마도자 역시 술을 좋아하여 황제와 더불어 밤낮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부도浮屠(부처)를 숭상하고, 지극히 사치하여 큰 비용을 사용하며, 친하고 가까이하는 사람은 모두 감모姏姆(나이 많은 여자 스승)와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 동진 시대에 효무제 사마요가 불교를 독신 하자, 황제의 좌우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투어 권력을 농단했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관직과 포상을 주는 것이 남발되고 혼잡하며, 형벌과 송사가 어그러지고 혼란스러웠다. 이는 결국 효무제 사마요가 정치를 등한시하고 불교를 독신 하여 권력의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효무제 사마요와 사마도자가 어떠한 불교를 신봉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처를 숭상하며 사치했다는 것은 불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기복 종교화된 불교는 신봉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대로 불교의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불교의 부작용이 중국 동진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이리하여 불교에 대한 비판도 나타났다.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남조 송 문제 원가 12년(435년)에 단양윤丹陽尹 소모지蕭慕之가 올린 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교화가 중국을 뒤덮은 지가 이미 4대를 지났는데, 불상과 사탑寺塔이 있는 곳이 수천입니다. 최근에 오면서 사람들은 마음의 들뜬 말초적인 것을 공경하고, 정성을 지극하지 않으며, 다시 사치스럽게 경쟁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니, 재목과 대나무, 구리와 비단을 써버리고 없애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효무제 사마창명 전적[위진남북조 중국 동진] 효무제 사마창명 전적


이러한 일은 신기神祈(천신天神과 지기地祈)에게도 관계가 없으며 사람들의 일에도 누가 되니 이것을 막지 아니하면 흘러다니는 폐단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의 세속화가 가져온 폐단을 바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불교는 원래의 정신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형식만 있고 알맹이를 갖지 못한 사상은 또다시 그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좌위영영장군 허영이 상소문을 올려서 그 시대의 혼란상을 거론했다.


즉, 당시 대부臺府(상서대) 등 관부의 관원과 숙직하며 호위하는 무관과 노복과 노비의 아이로 어머니의 성을 가진 자들은 본래 향읍에서 품제를 가진 일이 없지만, 모두 군수와 현령이 될 수 있거나 혹은 관직을 가지고 조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원래의 신분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허영은 이러한 신분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에 승려인 비구와 비구니가 끼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유모에 이르러서는 다투어 가까운 무리를 나아가게 하고 또한 재화와 뇌물을 받고 있어서 번번이 관직에 나아가 많은 사람을 관장하면서, 정치와 교화가 고르지 않아 죄가 없는 사람에게도 폭력이 남발하고, 금지하는 명령이 분명하지 않아서 협박하고 훔치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습니다."

이미 승려가 세속적인 직위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뇌물을 주고받는 일에 끼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구체적인 예도 찾을 수 있다.


황제인 효무제 사마요를 보필하여 정치를 제대로 해보려는 범녕은 그의 생질 왕국보가 아첨하자, 그를 내쫓으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되자 왕국보는 권력자 사마도자에게 총애를 받는 원열지에게 청탁을 했다.


그리고 원열지는 비구니 모음을 통해 태자의 어머니 진숙원에게,


"왕국보가 충성스럽고 근엄하니 의당 가까이하고 신임을 보이십시오."


라는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효무제 사마창명 불교[위진남북조 중국 동진] 효무제 사마창명 전적


이처럼 당시에는 황실 깊숙이 비구니가 들어와 있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영은 불교의 본래 정신과 괴리되는 불교의 잘못된 관행을 말했다.


"신이 듣건대 부처라는 것은 맑고 심원하며 오묘하고 현허한 신神인데, 지금의 승려와 비구니들은 왕왕 법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5계의 대략적 법도 아직 준수하질 못하는데, 하물며 정밀하고 오묘한 것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떠돌면서 유혹하는 무리가 다투어 공경하는 일을 더 하고, 또 백성들을 침범하여 낚아채고 재물을 빼앗으면서도 은혜로 여기게 하니, 또한 보시하는 도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5계란 불교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계율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간음하지 말라,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

셋째, 살생하지 말라,

넷째, 허망한 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라를 말한다.


이렇게 간단한 계율도 지키지 못하니 당연히 철학적으로 심오한 이론은 알지도 못하고, 다만 보시라는 이름을 빌려서 백성들의 재물을 낚아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이 상소문을 살피지 않았다.


중국 동진 불교의 부작용 (위진남북조) 효무제 사마요의 잘못

출처 :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 권중달, 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