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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시대 불교를 받아들인 명제 (중국 불교 시작)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2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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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시대 불교를 받아들인 명제 (중국 불교 시작)


불교를 받아들인 후한 명제[중국 후한 시대] 불교를 받아들인 후한 명제


불교가 맨 처음에 중국에 들어온 것은 유가 사상을 교학 체계로 발아들이었던 후한 명제 때이다.

후한 명제 영평 8년(서기 65년) 10월에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동생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비단을 받들고서 초나라 재상에게 가서 말했다.


"번국藩國(제후국)의 보신輔臣이 되어서 허물과 악함이 자꾸 쌓였는데, 큰 은혜를 받고 있음을 기뻐하여 비단을 받들어 보내드려서 허물과 죄를 사해 받고자 합니다."


이 말은 유영이 자기 자신이 한나라의 제후인데, 황제에게 비단을 공물로 바치겠다는 말이고, 이 뜻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초나라 재상에게 상의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초나라 재상은 바로 이를 명제 유장에게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알려줬다.

"초왕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미언微言(뜻이 깊은 말)을 외우고, 부도浮屠(부처)의 인자함을 숭상하여 깨끗하게 재계齊戒하면서 석 달이나 보내며 신神과 맹세를 했는데, 무슨 혐의가 있어서 마땅히 후회할만한 일이 있겠는가?


그 속죄를 위해 보낸 것을 돌려보내어 포색蒲塞(upasaka, 출가하지 않은 부처님의 제자)과 상문桑門(shramana, 수도자)의 성찬盛饌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이미 명제 유장은 그 이전에 서역의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을 불佛이라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처 그림을 보는 후한 사람들[중국 후한 시대] 부처 그림을 보는 후한 사람들


이에 사신을 천축국(인도)으로 파견하여 그 도道를 구하게 하고, 책사 사문沙門(승려)을 얻어오도록 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는 불교가 후한 명제 때에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불교에 관한 정보는 그 이전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불교를 수용한 후한 명제 이전인 전한 애제 원수 원년(기원전 2년)에 박사 제자 진경헌이 대월지왕의 사신 이존이 입으로 불경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한시대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중국에서 잘 전파되지 않았다.

그런데 명제 유장이 불교를 수용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일화가 있다.

명제 유장의 꿈에 금으로 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의 정수리에서 흰빛이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날아와 궁궐 뜰에 왔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명제가 이 내용을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부의가 그것이 바로 부처라고 대답했다.


한나라로 들어오는 승려와 수행원들[중국 후한 시대] 한나라로 들어오는 승려와 수행원들


이후 명제는 채음을 천축국(인도)에 사신으로 보냈더니, 그는 부처의 모습을 그리고, 사문 섭마등, 축법란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중국에는 사문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법이 생겨났다.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후한[중국 후한 시대]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후한


이것이 불교가 명제 때에 중국에 전해진 내용이다. 이때 불교의 내용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서술해 놓은 기록이 있다.


"그 책(불경)에서는 대게 허무虛無를 중심 교리로 삼고,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있다가 다시 형체인 몸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살아있을 때 행했던 선과 악은 모두 그에 따른 응보應報를 받는 것이므로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신을 수련하는 것이며, 끝에는 부처가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 대한 초급 수준의 이해였다.


아직 공空 사상과 같은 고도의 이론은 이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귀족 가운데 몇몇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후한 명제 일러스트[중국 후한 시대] 후한 명제 일러스트


그중 한 사람이 초왕 유영이었다.


"불교에서는 또 넓고 큰 말씀을 하면서 어리석은 속인俗人들에게 권유했다.


그 도道에 정통한 사람을 사문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중국에 처음으로 그 법술이 전해졌으며,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왕공王公과 귀인 가운데 다만 초왕 유영劉英만이 제일 먼저 그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불교가 전해졌다고 해도 유가학술을 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시절에 오히려 불교를 독신 했다는 초왕 유영은 특수한 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 권중달,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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