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당나라 번진할거 시대에 대해 (안사의 난 이후를 말함)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8. 09:10

번진할거藩鎮割據는 통상 당나라 안사의 난 이후를 말한다. 이 시기에 외지의 장령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군사, 재정, 인사 방면으로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는데, 이런 상태는 당나라가 멸망하는 백여 년간 지속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안사의 난 이후로 절도사의 수와 이들의 관할 지역을 늘렸는데, 이 관할 지역을 번진이라 부른다.

당나라 중앙정부에선 반란 세력 진압에 번진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힘은 당나라 혼란을 일으켰으며, 더 나아가 당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번진할거는 "안사의 난"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당나라 멸망 이후 출현하는 5대 10국의 양상도 번진 할거의 연장선이다. 번진할거 시대의 국내외적 문제는 당대, 오대, 더 나아가 북송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등을 포함한 포괄적 의미)


오대십국 일상생활 벽화


번진할거 시대는 각 번진 간 이해관계 속에서 이미 사분오열된 당나라 왕조가 사멸 직전까지 다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나라 중후기(약 150여 년)에 걸쳐 일어난 흐리터분한 정치 분쟁, 경제 개혁, 제도 교체는 문학예술 분야에 깊이 투영되기도 하였다. (백거이의 숯 파는 노인[클릭] 등이 대표적)


이처럼, 무려 반세기 넘게 중국 전역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이 시대를 개괄하여 번진할거藩鎮割據라 한다.


숯파는 노인 백거이


- "안사가 평정되고 번진의 화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당나라 번진 할거의 소란하고 어지러운 역사는 안사의 난 이후 시작됐다.

- "천하는 분열되고 법과 질서는 사라졌다", 황소의 봉기 이후, 이어진 오대십국 시기에 각 번의 영토도 군벌 간의 혼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763년에 안사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사실상, 당 의종懿宗 건부乾符 연간에 발발한 황소의 난까지 110년가량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 번진의 형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번진은 많아야 46개를 넘지 않았다. (46개라 콕 집어서 적어놨습니다. 제가 번진의 개수에 대해선 헷갈리니 지금은 pass~)


번진할거 시대 - 당나라 말기



출처 - 중국 위키백과 藩鎮割據

전에 신동준 씨의 오대십국지를 보고 오대십국이란 명칭[클릭]의 오류란 포스팅을 했었습니다. 신동준 씨의 주장이 흥미롭긴 했었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가 비단 국내에만 있는 건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요즘 이 시대의 책을 읽고 있는데, 오대십국이란 이름보단 번진시대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각 번진들은 황제의 의복과 예식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었으니, 실상 번진시대의 지도자들은 황제와도 같았습니다. 비록 당나라가 번진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당나라 조정은 하나의 번진에 불과했을 뿐이니깐요.


저도 5대10국이란 명칭보단, 번진 시대란 명칭으로 100년간의 시대를 통칭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국호만 세우지 않았지, 실상 번진들은 독립된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니깐요.


군웅할거 후한말기군웅할거 후한말기


여기서 비교할만한 시대가 바로 후한 말기에 이어진 군웅할거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를 삼국 시대라 표현하는 건, 번진 시대처럼 길게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이 시기의 역사도 후한의 역사가 아니라 위, 촉, 오의 역사죠.


이래저래 책들을 보고 자료를 보고나니, 결론을 다시 말씀드리자면, 오대십국이란 명칭은 잘못됐고, 번진시대가 옳다고 봅니다.


ps1. 중국어 실력이 짧아서 오역이 많을 겁니다.

ps2. 안사의 난에 대한 어느 분의 친절한 설명은 아래에.


안사의 난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입니다. 안녹산이 난을 일으킨 후에 이걸 진압하기 위해서 각지의 절도사를 동원하고 새로 임명하고, 투항한 역적들도 절도사로 받아들입니다. (사사명도 이 사례에 포함됩니다. 원래 안녹산과 같이 난을 일으키지만 투항 후 절도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안녹산을 잡아서 죽이고,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 뒤에 각지에 할거한 절도사에 대해서 중앙정부는 정리를 시도하지만 사사명등이 반발해서 다시 난을 일으켜 버립니다. 거기에 외적의 침입이 겹치게 되니 절도사들에 대한 정리작업이 될 리가 없습니다.


곽자의 당나라 정치가곽자의 당나라 정치가


당의 충신인 곽자의가 이때 침입한 외적(토번, 회홀, 당항족)을 대처하기에 바빠서 절도사에 신경 쓰기 힘듭니다. 외적인 토번에게 장안이 함락당할 정도이니 이게 급선무였지요. 그래서 지방의 절도사들이 할거를 하더라도 이때는 진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절도사들이 지방에 할거하면서 중앙의 고삐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니 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의 중앙정부에서 이런 번진할거를 놔두지는 않습니다. 신책군 등을 양성하여 제압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지방의 절도사직은 다시 중앙의 제어 아래에 속하게 됩니다. (국경에 접하지 않은 내지의 절도사는 중앙의 문관들이 임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