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부터 고려까지 국가들 소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6. 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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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은 솔직히 제대로 볼 줄 모르고, 다른 블로거들이 많이 올려놨기에 텍스트 위주로 올려 봅니다.


신라신라


신라 - 신라는 한반도 남동쪽에 있던 진한辰韓 12국 가운데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신라는 6세기에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대가야大伽倻를 병합(562년)하는 등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 문화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불교로 대표된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귀걸이 등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를 만큼 화려하고 뛰어난 세계적 금공예품이다. 불교는 골품제骨品制와 함께 신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한편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외래外來의 유물과 토용에서 보이는 서역西域 문화의 흔적은 신라의 대외 교류와 국제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국호 유래신라 국호 유래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하다.


고구려고구려


고구려 -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遼河에서 지린성吉林省 쑹화 강松花江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런桓仁, 지안集安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성,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고구려 연표고구려 연표


고구려 연표

기원전 37년 - 주몽, 졸본에서 고구려 건국

3년 -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김

194년 - 진대법 시행

313년 - 낙랑군 축출

372년 - 불교 수용, 태학 설치

414년 -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427년 -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김

475년 - 백제 한성 공격

612년 - 을지문덕 살수대첩

624년 - 당에서 도교 전례

645년 - 안시성 싸움 승리

668년 - 고구려 멸망

698년 - 발해 건국


백제의 건국백제의 건국


백제의 건국 -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왕溫祚王에 의해 건국되었다. 온조는 형인 비류沸流와 함께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정착하였다(기원전 18). 나라 이름은 십제十濟라 하였으며 그 후 백제百濟로 고쳐 불렀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 한산漢山 아래로 위례성의 주민을 옮겼는데 한성漢城의 위치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대형 집터, 제사 관련 건물지, 도로 등이 확인되어 초기 백제 도성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According to Samguksagi, Baekje was founded in BCE 18 by King Onjo, the son of Goguryeo's founder Jumong. There ar different opinions about the location of hanseong, but large-size dwelling sites, building sites related to rituals and roads were discovered to show how the capital of Baekje looked like.


백제 연표백제 연표


백제 연표

BC 18 - 백제 건국, 온조왕 즉위(삼국사기)


234년 - 고이왕 즉위

262년 - 율령 반포


346년 - 근초고왕 즉위

372년 - 근초고왕,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375년 - 고흥, 서기 편찬

384년 - 중국 동진에서 불교 전래


433년 - 신라, 백제 동맹 성립

475년 - 웅진 천도


501년 - 무령왕 즉위

525년 - 무령왕릉 축조

538년 - 사비 천도

552년 - 일본에 불교 전래

567년 - 능산리 절 창건


639년 - 익산 미륵사 서 석탑 조성

660년 - 백제 멸망


가야가야


가야 -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가야는 기원후 42년 수로왕에 의해 김해지방에서 건국되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이 지역의 풍부한 철을 기반으로 금관가야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금관가야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 왜 등과 철을 기반으로 한 국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5세기와 6세기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왕大王'이란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화려한 금제품 그리고 대형 봉토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와 힘을 겨를만큼 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문화의 특징은 부드러운 곡선미를 가진 다양한 형태의 토기, 많은 양의 철제 무기와 화려한 말갖춤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경남 김해 대성동, 함안 도항리, 합천 옥전, 고성 내산리와 경북 고령 지산리 등의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수준 높은 가야 문화를 잘 보여준다.


가야 건국신화가야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 신화


龜何龜何 首其現也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


가야의 건국신화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두 가지가 전해진다.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는 '하늘로부터 금빛 상자에 담긴 6개의 황금알이 구지봉에 내려왔다. 10일 후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중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가 수로이며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에게 감응되어 두 아이를 낳았는데 이들은 각각 대가야 왕과 금관국 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Turtle, turtle! Push out your head, if you don't, We will roast and eat you

For Gaya founding mythologies, two founding mythologies about Geumgwan-gaya and Daegaya have been handed down. According to the Geumgwangaya founding mythology, from the heaven, a golden box containing six golden eggs came down to Gujibong Peak, and the people sang and welcomed it. Ten days later, out of the eggs were born six babies; the first born was Suro, who became the king of Geumgwangaya. The other five became kings of the five Gayas. The Daegaya founding mythology says that Gayasan mountain deity Jeonggyeonmoju was spiritually moved by the Heavenly God, giving birth to two babies; one became the king of Daegaya(King Ijinasi), and the other, the king of Geumgwan(King Suro).


가야 연표가야 연표


가야 연표

42년 - 수로왕 즉위, 가야 건국

209년 - 포상팔국 전쟁

3세기 - 경질 토기 출현

3세기 - 철제 판갑옷 유행

400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 남정

479년 - 대가야 하지왕이 중국 남제에 사신 파견

521년 - 금관가야 구형왕 즉위

522년 - 대가야 이뇌왕 신라와 결혼 동맹

532년 - 금관가야 멸망

551년 - 우륵 가야금 연주

554년 - 아라가야 멸망

562년 - 대가야 멸망


3~6세기 우리나라3~6세기 우리나라


신라
261년 - 미추왕 즉위


400년 - 광개토대왕 원정

433년 - 신라, 백제 동맹

435년 - 역대왕릉 수리


503년 - 국호 (신라) 확정

527년 - 불교 공인

532년 - 대가야 정복


660년 - 백제 멸망

668년 - 고구려 멸망

676년 - 당나라 축출


통일신라 영역통일신라 영역


통일 신라의 10주州 - 수도 경주(금성), 양주, 강주, 상주, 명주, 무주, 전주, 옹주, 삭주, 한주


발해발해


발해 - 670년 신라와 당의 전쟁 이후 격동하던 한반도와 주변 정세는 당을 축으로 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는 국제 관계의 틀이 확립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합한 통일신라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발해가 새롭게 건국해 남북국 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698년 건국하여 926년까지 존속했으며, 당시 주변 국가인 당, 통일신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해동성국海東聖國으로 불렸다. 건국 이후 중앙의 3성 6부 조직을 완비하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지방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합, 재편해 갔다. 발해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고 불교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했다.


발해 지배층은 건국 당시부터 후기까지, 그리고 멸망 이후에도 지속해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생각해 왔다.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도 발해를 기본적으로 고구려 부흥 국가 또는 후계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발해는 이러한 고구려의 전통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였으며, 당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다.


발해 왕조의 정통성발해 왕조의 정통성


발해 왕조의 정통성 -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나라였지만 말갈인의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당의 지방 세력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한 엄연한 독립 왕조였다. 발해인들은 스스로 고구려 땅에 건국했다는 것을 표명하였으며,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758년 '견고려사' 목간과 속일본기의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다"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주변국들 역시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의 멸망과 직결되는 것으로 보고 고구려 후계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과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교하면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와당 역시 발해와 고구려의 문화적 유사성을 잘 보여 준다.


남북국 시대 영토남북국 시대 영토


이 당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발해인과 같은 취급 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북쪽 오랑캐들과 함께할 수 없다며 발해 유학생들을 경멸했죠. 당대에 단일민족 의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후삼국의 분립후삼국의 분립


후삼국의 분립 - 왕권의 안정화를 통해 중대의 전성기를 유지하던 통일신라는 '96각간의 난'으로 대표되는 혜공왕(765~780) 대의 정변을 거쳐 하대로 접어든다. 하대는 진골 귀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거듭된 시기였다. 하대의 극심한 혼란은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면서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후삼국의 정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후삼국은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의 왕으로 추대된 왕건에 의해 통일되었고, 통일신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후삼국 분립 시기는 역사상 분명히 큰 혼란기였지만, 이는 고려의 통일로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 전환기로 평가할 수 있다.



고려 - 고려는 한반도의 두 번째 통일 왕조로 918년 건국하였다. 송악(개성) 출신의 왕건이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성립한 고려는 고대 국가와는 구별되는 중세 국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억제하기 위해 전시과 제도를 만들고 각지에 지방관을 지속해서 파견하였으며,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을 확보하였다.


고려의 사상으로는 불교뿐 아니라 유교나 도교, 도참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적인 측면 외에도 고려는 이민족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개경의 문벌 귀족 문화와 각 지역의 독특한 지방 문화가 병존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를 다원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자국이었다. 또한, 고려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 동시에 발해 유민을 흡수하면서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송, 거란(요), 여진(금)과 실리 위주의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을 펼침으로써 격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고려 거란 1차 침입고려 거란 1차 침입


마지막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동영상 파트도 있는데 이거 뜻밖에 재밌습니다. 위 사진은 고려의 영토 변천 편인데요. 동영상 총 길이는 대게 3~10분이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어요. 이거 놓치지 않길 권합니다. 정말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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