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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가 미앙궁을 크게 지은 데 대한 논 - 이가환이 정조에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7. 6. 06:00

신은 삼가 논합니다. 거룩하고 밝은 임금과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함께 나라의 계책을 토론하는 경우에는, 그 염려가 항상 깊고도 멀어서 다른 사람에게 고해주지 않습니다. 이는 고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세상 고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앙궁 일러스트미앙궁 일러스트


지금 한고조漢高祖는 규모規模가 굉하여서 천지天地를 쳐들 만 한 도량이 있었습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두루 보고서 탄식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고조가 일찍이 함양咸陽을 두루 둘러보다가 진 황제秦皇帝를 보고는 위연히 탄식하기를, "아, 장부라면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한다"고 하다. 史記 卷8 高祖本紀) 그러다가 함곡관函谷關 안으로 들어가서 아방궁阿房宮을 보면서는 마치 본디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것은 구구한 것들을 보고서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미앙궁未央宮을 바라보고서는 그 장려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소하蕭何는 다스리는 체통에 대해 아주 숙달되어서 인걸人傑이라는 호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궁실宮室을 가지고 사람들을 진복鎭服 시키려고 하였으며, 또한 후세로 하여금 더 크게 지을 수 없도록 장하게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사기虒祈가 이루어지자 제후諸侯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사기는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지은 궁궐의 이름이다. 이 궁을 지을 때 숙향叔向이 궁궐을 지으면 제후들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는데도 평공이 궁궐을 짓자, 끝내 숙향의 말대로 되었다) 경박景亳의 궁궐이 끝내는 요대瑤臺가 된 것을(경박은 상商나라의 도읍지를 말하는데, 이 도읍지에는 삼 박三亳이 있어 서박西亳, 북박北亳, 남박南亳으로 구별되는데, 경박은 북박에 해당하며, 뒤에 탕湯 임금이 이곳에서 명을 받았다. 요는 화려한 누대樓臺를 말한다) 모르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함곡관 현재 모습 1함곡관 현재 모습 1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는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른바 깊고도 먼 염려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고해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인 듯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깊은 염려라고 하겠습니까? 소하가 미앙궁을 지은 것은 부득불 짓지 않아서는 안 되는 때를 당하였으면서도 부득불 그만두지 않아서는 안 되는 형세를 당해서였습니다. 이른바 때라는 것은, 고금(古今)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릇 세상에서 옛날의 성왕들은 초가집의 궁궐과 낮은 궁궐에 거처한다는 설을 가지고 후세의 임금들을 힐난하는 자들은 모두 변화에 통달한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주周나라의 융성함이 있는 뒤로는 그 궁궐의 제도가 고공기(주례 제6편의 편명이기도 하면서 별도의 책이기도 하다. 전체가 1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적으로 백공(百工)에 관한 일을 서술)에 보이는 것을 보면, 옛날의 궁궐에 비하여 몇 배나 더 클 뿐만이 아닙니다.


미앙궁 복원도미앙궁 복원도


무릇 주공周公과 같은 거룩한 분께서 어찌하여 멀리 요堯 임금과 우禹 임금을 본받지 않고 곧장 이처럼 장하게 하겠습니까? 이 어찌 조정 안의 백관百官들과는 세 계단의 섬돌(요순堯舜 시에는 '궁궐의 지붕을 띠풀로 이고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도 않았으며, 흙으로 세 계단의 섬돌을 만들뿐이었다.[茅茨不剪 土 階三等]'는 말이 사기史記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나온다. 전하여 임금이 아주 검소하게 지내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안에서도 즐겁게 지낼 수가 있지만, 만방萬邦의 제후들과는 반드시 구문九門(옛날 천자의 궁궐 안에 설치하던 아홉 개의 문을 말한다. 옛날의 궁실 제도에 천자는 아홉 개의 문을 두고 제후는 일곱 개의 문을 두었다)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용기龍旂와 구유九游의(용기는 용기龍旗로, 두 마리 용이 날아오르는 형용을 그린 기를 말하며, 구유九游는 구유九旒와 같은 말로, 옛날에 천자의 깃발에 달던 아홉 갈래의 수술을 말한다. 전하여 천자의 행차에 쓰이는 의장을 말한다) 성한 깃발을 세우고, 고멱羔幦과 착형錯衡(고멱은 양가죽으로 만든 수레 덮개를 말하고, 착형은 금빛으로 칠해 장식한 수레의 횡목橫木을 말한다. 전하여 화려한 장식을 한 수레로, 천자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의 편안한 수레를 타고, 측재側載와(한 그릇에 하나의 물건만을 담는 일) 고지睾芷(이 부분이 원문에는 皐芷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다. 고지는 향초香草의 이름이다. 순자荀子 정론편正論篇에 이르기를, "고지를 한쪽에 싣고 가는 것은 코를 잘 기르기 위해서이다.[側載睾芷 以 養鼻]"라고 하는데, 그에 한 주에 "고지睾芷는 향초香草다” 하다)의 향기를 드날리는 신분으로서, 겨우 몸 하나만 들어가 있을 수 있는 집에 거처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한 바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때라는 것입니다.


함곡관 현재 모습 2함곡관 현재 모습 2


그리고 이른바 세勢라는 것은, 치란治亂이 그것입니다. 무릇 진秦 나라와 초楚나라의 학정을 거친 나머지를 당하여, 백성들은 귀에 꽹과리 소리만 들려와도 놀라고, 눈에 깃발의 색깔만 보아도 어지러우며, 상처가 난 몸을 돌보기에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전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야흐로 무너지듯이 쓰러져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다."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다시 토목공사를 일으켜 괴롭힌다면, 비록 집집이 사람을 보내어 시대가 변한다는 말을 하면서 깨우치더라도,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반드시 빙 둘러싸고 노려보면서 원망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勢라는 것입니다. 무릇 부득불 그만두어야만 하는 형세에 처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해야 하는 때를 만났을 경우, 이것은 천하에서 지극히 어려운 일로 서, 하찮은 재주나 보잘것없는 지혜를 가진 자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부득불 조금 늦추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그 일을 하는 것을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하는 반드시 고제高帝가 외방에 나가 있기를 기다려서 미앙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고제는 또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소하를 꾸짖었습니다. 아, 함곡관函谷關을 넘어와서 도읍都邑을 정한 이후에 궁궐을 지을 만한 날짜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법궁法宮(궁궐의 정전正殿으로, 옛날에 임금이 정무를 처리하던 곳을 가리킨다)을 지으면서는 반드시 고제가 어가御駕를 타고 돌아다니는 때에 맞추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제는 외방에 나가 있을 적에 승상의 기거와 움직임에 해서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법궁을 건립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마치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은 모두 저로서는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본다면, 한가로이 말을 나누는 즈음이나 긴하게 계책을 논하는 즈음에 천문 만호(千門萬戶)가 이미 고제와 소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계획하는 사이에 다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함곡관 현재 모습 3함곡관 현재 모습 3


이것은 대개 평발平勃(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창업 공신들로서 한 고조가 한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큰 공을 세운 표적인 인물인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의 병칭이다. 이들은 한고조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서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 고조가 죽은 뒤에도 여후呂后에 의해 주도된 여씨呂氏의 난을 평정하여서 한 나라가 유씨劉氏들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하다. 이에 후에는 임금을 잘 보좌하는 표적인 재상으로 손꼽혔다)이 능히 끼어들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며, 천고遷固(한나라 때의 표적인 역사가로,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과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병칭)가 능히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미앙궁을 보는 자들은 크게 일으킨 데에 속아서 능히 왜 그랬는지에 해서는 밝히지 못하였으며, 후세에 그것을 보는 자들은 또 크게 일으킨 것을 전하면서 그것으로 인하여 드러내었습니다. 천하를 떠맡은 책임을 지고서 천하의 일을 이룬 사실에 대해서 까마득히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미앙궁 추정도 CCTV 1미앙궁 추정도 CCTV 1


미앙궁 추정도 CCTV 2미앙궁 추정도 CCTV 2


미앙궁 추정도 CCTV 3미앙궁 추정도 CCTV 3


미앙궁 추정도 CCTV 4미앙궁 추정도 CCTV 4


미앙궁 추정도 CCTV 5미앙궁 추정도 CCTV 5


아, 이것이 어찌 한 사람 한 사람씩 잡고서 고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림上林의 땅을 청한 것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감옥에 갇히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소하가 장안長安의 땅이 비좁은데 상림上林 안에는 버려져 있는 빈 곳이 많으니, 이곳에다가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라고 청하자, 고조가 크게 노하여 소하를 옥관獄官에게 내려 감옥에 가두었다가 며칠 뒤에 풀어주었다. 史略 卷2 西漢高祖) 그런데 도리어 제멋대로 큰 역사를 일으키면서는 의심과 노여움을 불러오기에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고제와 같이 의심이 많은 임금으로서도 내맡겨두고서 캐묻지 않았으며, 소하와 같이 공손하고 신중한 신하로서도 그 일을 하면서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자로서 균사鈞駟를 갖출 수가 없고, 재상으로서 우거牛車를 타야 할 만큼의 궁핍한 재력財力( 사기에 이르기를, "한漢나라가 장정들은 군려軍旅 에 종사하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재정이 고갈되어, 천자는 균사鈞駟를 갖출 수가 없었고 장상들은 우거牛車를 탔다." 하는데, 균사는 털의 색깔이 똑같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말하고, 우거는 소가 끄는 수레를 말한다. 史記 卷30 平準書)을 가지고서도 급급하게 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부득불 그만두어야만 하는 형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부득불 그렇게 해야만 하는 때에 처하여서 편법을 써 천하의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소하는 대개 고제가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알았으므로, 고의적으로 이 일을 벌여 고제를 장안長安에 묶어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아, 비단옷에 한 동요童謠를 듣고 팽성彭城에 도읍한 것(항우가 함양咸陽에 도읍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팽성彭城에 도읍한 것을 말한다. 항우가 일찍이 진나라의 함양을 도륙한 뒤에 혹자가 그에게 함양에 그대로 머무르기를 권유하자, 진나라의 궁실들이 모두 파괴되어버린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고 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팽성에 도읍하다가 유방(劉邦)에게 패하고 말았다)이 바로 항적이 패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한나라 소하 일러스트한나라 소하 일러스트


고제와 같이 현명한 사람이 어찌 그렇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소하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어찌 고제가 반드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소하가 스스로 자신의 전택을 지으면서는 말하기를, "나의 후로 하여금 어진 자는 나의 검소함을 본받고, 어질지 못한 자의 경우에는 세가勢家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하가 전택을 지으면서 궁색하게 짓고 담장을 두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후로 하여금 어진 자는 나의 검소함을 본받고, 어질지 못한 자의 경우에는 세가勢家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後世 賢 師吾 不賢 毋爲勢家所奪]"라고 하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이것이 바로 검소함을 숭상하는 본뜻이었습니다.


그런즉 미앙궁을 성하게 지은 것은, 부득불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던 데에서 나왔다는 것이 역시 분명합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주醴酒는 현주玄酒(제사나 의식에 쓰는 물을 말한다. 물의 빛이 검으므로 현玄 자를 붙인 것이며, 태고 적에는 술이 없어서 제사 때 술 대신 물을 쓴 데서 연유하다)에서 시작되었고, 대로大輅는 추륜椎輪에서 시작되었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소통蕭統의 문선서文選序에 이르기를, "추륜은 로의 시초가 되었다.[若夫椎輪爲大輅之始]"


고 하는데, (대로는 옛날에 천자가 타던 옥으로 만든 수레이고, 추륜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든 초라한 수레이다)고 하였습니다. 백관百官과 서사庶事는 옛날보다 더 불어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유독 미앙궁에 해서만 의심을 한단 말입니까?


무릇 성인聖人이 어찌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스러움을 억제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그 집을 풍부하게 함은 하늘 끝에 나는 듯함이다.[豊其屋 天際翔也]"라고 하였습니다. (주역 풍괘豊卦 상육上六의 상象에 나오는 말이다) 의문이 날이 갈수록 더 화려해지고, 제도制度가 날이 갈수록 더 갖추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점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이상과 같이 논합니다. 


출처 - 금대전책,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을 크게 지은 데 대한 논論 삼상三上


미앙궁 유적지미앙궁 유적지


ps. 이가환이 소하의 미앙궁을 논한 기록


소하는 한나라 개국공신으로 삼걸三傑 중 한 사람이며,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이다. 한 고조漢高祖 7년에 소하가 미앙궁未央宮에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을 세우면서 아주 장엄하게 세웠는데, 고조가 그 궁을 보고 궁실을 과도하게 꾸몄다고 나무랐다.


그러자 소하가 


"천자는 사해四海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므로 장엄하게 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


고 하자, 고조가 화를 풀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일성록을 보면, 정조 5년(1781) 8월 8일 기사에 "정조가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제술製述, 문신文臣의 제술, 문신의 전경강을 행하는데, '소하가 미앙궁을 크게 일으켰다.[蕭何大起未央宮]'는 것으로 논제(論題)를 삼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며, 또 "시권을 채점하다가 논論 한 편에 이르러, 정조가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잘 지었다.’고 하고는, 등급을 삼상三上이라 쓰고 봉미彌를 뜯으니, 바로 이가환李家煥이었다.”는 내용의 기사와 "정조가 이르기를, ‘명성은 헛되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니, 언뜻 그 글을 보기만 하고도 월등한 등급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가환은 그동안 모두 네 차례 장원壯元이었다.’고 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명선이 ‘이가환 같은 자는 이미 그 재주와 식견이 출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조정이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특별히 장려하여 등용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정조가 ‘경의 말이 옳다.’고 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