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하멜 표류기에 적힌 조선의 대기근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3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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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곡식과 그 밖의 다른 작물을 별로 수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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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수를 할 때까지 상황이 더 어려워서 수천 명의 사람이 기근으로 죽어갔다. 도로를 이용하기가 어려웠는데, 그건 도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으로 모든 도로에 경비대가 주둔했는데, 그것은 여행자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아사餓死한 사람들을 매장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일어나는 살인이나 강도를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기근으로 궁핍하던 시대의 하멜기근으로 궁핍하던 시대의 하멜


몇몇 고장과 마을들이 털리고 국고(“쌀 창고는 해안의 몇 군데에 있었는데 인근 지역의 기근에 대비했고, 공덕功德에 따라서 구호물 지급자에게 왕이 내리는 상을 주었다.”[파커, “조선”, 「차이나 리뷰」ⅪⅤ, 129].)가 습격당해 곡물을 강탈당했는데 범죄자들이 잡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 고관들의 하인이 그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대부분 도토리, 소나무 안 껍질, 풀로 연명해 갔다. 이제 이 나라의 위치와 그 국민이 사는 모습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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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이상 기근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 백성들은 수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저지대나 하천 유역에 위치한 고장은 다른 고장에 비해서 수확이 좀 더 있었고 그곳에서 약간의 쌀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국민 전체가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올 초에 우리 수군절도사(당시 수군절도사는 구문치具文治)는 더는 우리 몫의 쌀을 지급할 수가 없어서 이를 전라도 관찰사(전라도 관찰사는 이태연李泰淵)에게 편지로 알렸다. 우리의 식량은 왕의 세입稅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왕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었다.


소빙하기에 표류했던 하멜소빙하기에 표류했던 하멜


2월 말에 절도사는 우리를 세 고장으로 분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수(하멜은 여수라고 말하지 않았고 saijsingh[새성]이라든지 naijsingh[내성]이라 했다. 그 말뜻은 전라도 서쪽 수군 지대라는 뜻인데[좌수영] 내례포에 있다[레드야드, 70]. 1593년까지 이 지역은 조선의 가장 유명한 해군 사령관[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수군 본부였다.)에 12명, 순천(조선 왕조 초기에 전라도 수군 본부였다.)에 5명, 남원(한때 전라북도의 행정 중심지였다. 남원 성채의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에 5명씩으로 분산되었는데 우린 그때 모두 22명이 살아있었다. (1656년 전라 병영에 도착했을 때 그들 숫자는 33명이었는데 7년 뒤에 22명이 되었다. 11명의 사람이 사망했음이 틀림없다.)


전라도 각 고을로 분산된 하멜 일행전라도 각 고을로 분산된 하멜 일행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 몹시 슬펐다. 이곳에서 이 나라 관습에 따라 집, 가구, 조그마한 텃밭을 마련하여 그런대로 안정된 삶을 살았었는데, 몹시 어렵게 장만한 이런 것들을 다 두고서 떠나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이 계속되면 새로운 고장으로 옮겨가도 이만큼 편안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슬픔은 구출된 사람에게는 (다시 말해서 일본으로 탈출한 사람들에게는)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다.


3월 초에 절도사와 작별하고 그에게서 받은 대우에 감사하면서 우린 각각의 고장으로 떠났다. 관찰사는 환자와 우리 소지품을 위해 말을 지급해 주었으나 건강한 사람은 걸어가야 했다. 순천과 여수로 가는 사람은 같은 길로 떠났다. 도중에 이곳저곳 묵으면서 나흘이 걸려 순천에 당도했다. 이곳에 남기로 된 5명을 남겨둔 채 다음 날 이곳을 떠났다.


그날 밤은 국가의 창고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새벽에 출발, 9시경에 여수에 도착하여 우리와 동행한 관찰사의 부하가 우리를 그곳의 사령관, 즉 전라도 수사水使에게 인계했다. 그는 곧 가구가 약간 붙어 있는 집을 제공하고 여태까지 받았던 것과 같은 식량 배급을 주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 같았는데 우리가 도착한 지 이틀 후에 떠나게 되었다.


대기근으로 이방인을 챙길 여력이 없던 조선대기근으로 이방인을 챙길 여력이 없던 조선


전임 좌수사가 떠나고 3일 후에 그 후임이 부임했는데, 이게 우리에게는 시련이었다. 매일 우리는 여름철에는 뙤약볕 아래서, 겨울에는 눈비를 맞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기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온종일 화살을 주웠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부하들이 일등사수(여수 앞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섬 오동도는 아주 다양한 대나무로 유명한데 조선의 궁사弓士들이 이를 화살로 썼다.)가 되려고 활 쏘는 연습만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일도 많이 시켰는데, 기독교인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죄값을 받게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우리는 커다란 슬픔 속에 기운 없이 터벅터벅 같이 다녔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흉년 때문에 여벌의 옷이 없었다. 다른 고장에 사는 동료들은 그곳의 작황作況이 한결 나아서 우리보다는 옷을 더 낫게 입을 수 있었다.


이를 좌수사에게 상신上申(상부 기관이나 윗사람에게 의견이나 상황 따위를 말이나 글로 여쭘)하여 3일간씩 교대로 우리 중 절반은 일(의무를) 하고 나머지 절반은 식량을 구하러 다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은 결국 잘되었다. 고관들이 우리를 동정하여 기일에 대해서는 묵인해 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15일 또는 30일 가량 외출하여 얻어 온 것들을 똑같이 분배했다. 이는 현 좌수사가 이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하멜표류기, 서해문고, 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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