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기록 - 하멜표류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6. 1.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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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바람이 너무 심해서 갑판 위에서는 서로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며 더더구나 작은 돛조차도 올릴 수가 없었다. 배가 바닷물을 많이 뒤집어썼기 때문에 바닥의 물기를 퍼내느라 일을 계속해야 했다. 바다에 계속 비바람이 몰아쳐서 연이어 물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우린 침몰당하여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저녁 무렵 이물[船首]과 고물이 파도에 거의 떨어져 나갔고 선수船首 사장斜檣마저 헐거워져서 이물 전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물을 몽땅 잃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으나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집채만 한 파도가 연이어 우리를 덮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파도를 벗어나기 위한 더 나은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앞 돛대의 돛을 조금 느슨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명과 배와 회사의 상품을 구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한 폭풍우로 인한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 다음으로 이것이 최상의 수단일 거로 생각하면서.


앞 돛대의 돛을 느슨하게 하고 있을 때 파도가 고물 위에 덮쳐와서 갑판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이 하마터면 파도에 휩쓸려 버릴 뻔했다. 배에는 물이 넘쳐 나서 선장이 “동료들이여, 하나님에게 맡기자. 그와 같은 파도가 한두 번 덮치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고 소리쳤다.


밤 1시경 망을 보던 사람이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다!”


표류하게된 하멜표류하게된 하멜


육지와 우리는 단지 머스킷 총의 사정거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둠과 폭우 때문에 좀 더 일찍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곧 닻을 내리고 배를 돌렸는데 거친 파도와 심한 바람 때문에 닻이 지탱을 못 했다. 그때 갑자기 배가 바위에 부딪혀서 세 번 충돌하는 사이 배 전체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갑판 밑의 침대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갑판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죽었고,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들기도 하였으며 파도에 이리저리 밀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중 15명이 육지에 다다랐는데 대개 알몸이었고 많이 다쳐서 다른 사람들은 아마 죽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위에 앉아 있다 보니 난파선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으나 어둠 때문에 알아볼 수도 없었고 도와줄 수도 없었다.


8월 16일 새벽녘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혹시 누군가 육지에 다다른 사람이 있나 찾아보고 소리쳐 불러도 보았다. 여기저기서 몇 사람이 더 나타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36명이 되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한 사람이 난파선 속에서 커다란 나무통 두 개 사이에 끼어 있어서 곧 구출해 내었으나 3시간 후에 죽고 말았다. 그의 시체는 심하게 뭉개져 있었다.


우리는 비참한 심정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답던 배는 산산이 조각나고 64명의 선원 중 불과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모든 일이 15분 사이에 일어났다.


우린 해안으로 밀려 올라온 시체를 찾아다녔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선장 레이니어 에흐버츠는 물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서 팔베개를 한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우리는 곧 여기저기서 발견된 6, 7명의 죽은 선원과 함께 그를 매장했다.


우리는 지난 2, 3일 동안 거의 먹지 못했기 때문에 해안으로 밀려온 식량이 없나 하고 찾아보았다. 요리사는 나쁜 날씨 때문에 조리할 수 없었다. 밀가루 한 포대, 고기 한 통, 베이컨과 붉은 스페인산 와인이 들어 있는 나무통만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포도주는 다친 사람에게는 유용한 것이었다.


불을 구할 수 없었고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섬이 무인도라고 생각했다. (갤리선 켈파르트’라는 배가 1624년경 동북쪽을 항해하다가 제주도를 처음 발견하고 이 사실을 동인도 회사에 보고했는데, 이후 이 배의 이름을 따서 ‘켈파르트’ 섬이라 불렸다) 정오 무렵 비바람이 잦아들자,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돛을 가지고 텐트를 쳤다.


8월 17일 우리는 모두 비참한 심정이 되어 사람을 찾아 나섰다. 일본인을 만나길 바랐는데 그래야만 우리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배나 구명보트는 산산조각이 나서 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해결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에게 발견된 하멜 일행조선인에게 발견된 하멜 일행


정오 조금 못 되어 대포의 사정거리[약 200~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에게 손짓했지만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가 버렸다. 정오 직후에 세 사람이 머스킷 총의 사정거리쯤 거리를 두고 왔으나 우리가 손짓 발짓 다 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 쪽에서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로 가서 총을 들이대고,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불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사람들은 중국식 복장을 했는데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해적이 사는 곳이나 추방된 중국인이 사는 땅에 온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저녁 무렵 약 100명 정도의 무장한 남자들이 텐트 주변으로 와서 우리 인원수를 세고 밤새 우리를 감시했다.


8월 18일 아침에 좀 더 큰 텐트를 만드느라 분주했는데, 정오 무렵 1천 명 또는 2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기병騎兵과 군졸들인 듯했다. 그들은 텐트를 포위하고 서기, 일등항해서, 이등 갑판장, 사환 아이를 연행해 갔다. 지휘관에게 이 4인이 데리고 가니 지휘관은 각각의 목에 쇠사슬을 감았는데, 거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양의 목에 매다는 방울처럼 생긴)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기어서 지휘관 앞에 다가가게 하고는 꿇어 엎드리게 했다. 지휘관 옆에 있는 군사들이 벽력같이 소리를 질러 댔다. 텐트 안에 있는 선원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에게 “우리도 끌려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곧 우리도 무릎을 꿇으라고 해서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 지휘관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린 손짓 발짓해 가며 일본에 있는 나가사키로 가려 했다는 걸 말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린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었고 그들은 Japan[야판]이라는 말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Japan을 왜나라 혹은 일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은 우리에게 각각 술 한 잔씩을 주게 하고는 텐트로 되돌려 보냈다. 우리를 호위한 군사들은 혹시 텐트 속에 식량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안으로 들어왔으나 앞서 말한 고기와 베이컨밖에 없다는 걸 알고는 이를 지휘관에게 알렸다. 약 1시간 뒤에 우리에게 죽을 가져다주었는데 우리가 그동안 굶었고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으면 해로울 거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제주목사 이원진의 장계 - 하멜 묘사제주목사 이원진의 장계 - 하멜 묘사


오후에 그들 각각이 밧줄을 가지고 우리에게 왔기에 혹 우리를 묶어 죽이려는가 싶어 덜컥 겁이 났는데, 그들은 난파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시끌벅적 떠들면서 쓸 만한 것을 주워 모아 묶었다.

저녁에는 우리에게 쌀밥을 주었다. 그날 오후에 일등항해서는 관측하더니만 우리가 북위 33도 32분에 있는 켈파르트[제주도] 섬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일등항해사인 암스테르담 출신의 헨드릭 얀스가 켈파르트 섬의 존재를 알았다는 걸 보여 준다. 나가사키에 있는 회사 일지에는 1647년 11월, 그 섬이 언급되어 있다. “마테우스 에보켄이라는 생존자가, 그들이 켈파르트 섬에 붙잡혀 있었고 일등항해서가 이 섬을 알고 있었으며 이곳은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비츤 I, 150] 제주는 북위 33도 12분에서 33도 30분 사이에 있는데 이는 당시의 도구와 장소를 고려해 본다면 일등항해서의 관측이 정확함을 말해 준다.)


하멜의 눈에 비친 조선하멜의 눈에 비친 조선


8월 19일 그들은 표류물들을 해안으로 옮기고 그것을 볕에 말리고 못이나 쇠붙이가 붙어 있는 나무를 태우느라 바삐 움직였다. 우리 쪽 상급 선원들이 지휘관과 섬의 병마절도사에게로 가서 그들 각자에게 쌍안경[망원경]을 주었다. 우리 쪽 상급 선원들은 붉은 포도주와 그것을 따르는 술잔(이것은 회사 소유로 암초 사이에서 발견한 것임)도 가지고 갔다. 포도주 맛을 보더니만 아주 맘에 들어 하면서 많이 마셨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은잔도 돌려주고 텐트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8월 20일 아침, 절도사는 우리에게 천막 안에 있는 물건들을 봉인하게 자기 앞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해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 짐을 봉인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있을 때, 인양 작업 중 짐승 가죽이라든가 철물, 그 밖의 것들을 훔쳐간 몇몇 도둑들이 끌려왔다. 도둑들에게 물건을 등에 지게 하고는 우리 앞에서 그들을 처벌했다. 우리 물건이 앞으로는 도난당하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길이가 1m쯤 되고 굵기가 보통 아이의 팔뚝만 한 몽둥이로 발바닥을 맞았다. 일부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는데 한 사람당 30대 내지는 40대를 맞았다.


출처 - 하멜표류기, 서해문고, 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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