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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이 설치한 화랑에 대해 - 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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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跋扈)하여 사대주의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ㆍ풍속ㆍ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ㆍ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화랑파(花郞派)에 스스로 기록한 문헌인 선사(仙史)ㆍ화랑세기(花郞世紀)ㆍ선랑고사(仙郞故事) 등은 다 없어져서 화랑의 사적을 알자면 오직 화랑의 문외한인 유교도(儒敎徒)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무극(無極 :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두 책 가운데 과화숙식(過火熟食 : 생각지 않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유익하게 됨)으로 적은 수십 줄의 기록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수십 줄의 기록이나마 정확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제 삼국사에 보인 화랑 설치의 실록(實錄)을 말하려 한다.


신라의 꽃 화랑신라의 꽃 화랑

(출처 : 신라와 꽃 화랑)


사기 진흥대왕 본기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가 모여서 떼 지어 놀게 해서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채용해서 쓰고자 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골랐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 무리가 3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억지로 술을 권하여 몹시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이 쳐형되니 무리들이 불화해져서 다 흩어져버렸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몸을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여 받드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연마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도 하며, 산수(山水)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아니 가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바로고 그름을 알아서 착한 사람을 골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교를 베푼 근원으로 신사(神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 : 유교ㆍ불교ㆍ선교)를 포함하고 있어 인간을 접화(接化)하며 또한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한 것은 노사구(魯司寇 : 공자孔子)의 취지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 : 노자老子)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고 한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석가모니釋迦)의 교화(敎化)이다."라고 하였다.


진흥왕과 화랑의 활약. 신라 전성기진흥왕과 화랑의 활약. 신라 전성기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의 자제로서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몸을 단장하게 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여 섬겼다.’고 하였다."


글의 끝에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화랑을 몹시 찬미한 듯하나 자세히 상고해보면 크게 잘못되고 황당하다.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의하면 사다함이 가라(加羅) 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대왕(眞興大王) 23년이니, 37년 이전에 이미 화랑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제 37년에 화랑이 비롯하였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이니 원화를 폐지한 뒤에 남자 교사를 두어 국선(國仙) 혹은 화랑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원화를 화랑이라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김부식의 때에는 화랑의 명칭도 아주 끊어지지 않고, 화랑의 문적(文籍)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소위 사기에는 그 설치의 연대를 모호하게 하고, 그 원류(源流)의 구별을 가리지 못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김부식은 유교도의 영수(領袖)로서 화랑파 윤언이(尹彦頤)를 내쫓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한 자이니 그의 마음대로 하자면 삼국사기 가운데 화랑이라는 명사(名詞)를 한 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겠지마는 다만 그는 지나를 숭배하는 사람이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고 지나의 서적에 나왔으면 이를 사기에서 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화랑을 시샘하여도 다만 지나의 대중 유사(大衆遺事)ㆍ신라국기(新羅國記) 같은 글 속에 화랑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은 사기에서도 빼지 못하였다.


그가 이 장 끝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擇貴人子弟)’ 이하 모두 24자에 지나지 아니하나 도종의(陶宗儀)의 설부(說郛)에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채용하여 쓰고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그 이하의 사실과 김대문ㆍ최치원의 논평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처럼 신라국기에 있는 화랑 설치의 사적을 인용하고,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말살해버렸다.


그다음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랑의 실록은 다음과 같다.


"진흥왕이 즉위하였다……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남의 집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서 원화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선비를 뽑고, 또 효ㆍ제ㆍ충ㆍ신(孝悌忠信)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 준정랑俊貞娘) 두 원화를 선출하니 무리가 3, 4백 명이나 모였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투기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남모랑을 취토록 마시게 하여 몰래 끌어다가 죽이고 북천(경주 북쪽에 있는 내) 물속에 돌로 눌러 매장했다. 무리가 그녀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슬피 울며 흩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돌아다니며 부르게 하였다.


원화를 모으다원화를 모으다


준정의 남모 살해준정의 남모 살해

(출처 : 신라와 꽃 화랑)


남모랑의 무리가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진흥왕)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는데 몇 해 뒤에 왕이 다시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風月道 : 화랑도花郞道)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서 덕이있는 사람을 뽑아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고치고,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였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좀 자세하나 상말에 이른바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이 나온 소리가 작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선을 숭상하여 원화ㆍ화랑을 받들었다 하였으니 원화나 화랑이 도사(道士)나 황관(黃冠 : 야인野人)의 종류란 말인가?


삼국유사의 작자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작자인 유교도같이 남을 배척하는 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일반이다.


국선ㆍ화랑(國仙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배’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썼음은 이미 제3편에서 말하였다.


‘선배’를 신수두 단(壇) 앞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고 수박(手搏)ㆍ격검(擊劍)ㆍ사예(射藝)ㆍ기마(騎馬)ㆍ택견ㆍ깨끔질ㆍ씨름 등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사방의 산수를 탐험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자고 먹고 하며, 평시에는 환난(患難)의 구제, 성ㆍ길 등의 수축 등을 스스로 담당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國仙)이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위에 국(國)자를 더하여 지은 이름이고, 화랑이란 고구려의 ‘선배’가 조백(皀帛)을 입어 조의(皀衣)라 일컬은 것과 같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일컬은 것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


원화는 마치 유럽 중고시대 예수교 무사단(武士團)의 여교사(女敎師)처럼 남자의 정성(情性)을 조화하기 위하여 둔 여교사이니, 소재만필(昭齋謾筆)에


"화랑의 설(說)에 사람이 전쟁 중에 죽으면 천당(天堂)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며,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하여 화랑들이 소년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즐겼다."


고 하였으니, 다만 국선(國仙)의 선(仙) 자로 인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구하는 지나의 선도(仙道)로 알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株史)의 종지이다.”라고 한 것은 다만 국선의 교가 유ㆍ불ㆍ도 삼교의 특징을 갖추어 가졌음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무위나 불언과는 거리가 아주 천만리나 떨어진 교이다.


앞에 말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玄妙)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류(風流)”라 이름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고, 앞에 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풍류는 지나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고, 풍월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咏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달라 기술도 힘쓰지마는 음악과 시가에 가장 전념하여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보인 진흥왕이 지은 도령가(徒領歌)와 설원랑(薛原郞)이 지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물론 화랑이 지은 것이거니와, 삼국유사에 이른바 “신라 사람들이 향가(鄕歌)를 매우 숭상했다. 그러므로 왕왕 능히 천지와 귀신을 감동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라고 한 향가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가 지은 것이다.


화랑세기 발견 신문기사화랑세기 발견 신문기사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이 연극을 행했으니,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이나 노래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아니했다 함은 삼국지에도 분명히 실려 있거니와, 신라가 습속(習俗)으로 교도(敎導)의 방법을 세워 시가ㆍ음악ㆍ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하였기 때문에, 원래 조그만 나라로서 마침내 문화상ㆍ정치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의 원류(源流)를 적은 선사(仙史)ㆍ선랑고사(仙郞故事)ㆍ화랑세기(花郞世紀) 등이 다 전해지지 않았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ㆍ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를 적은 것이니, 고구려 본기의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라 한 것이 곧 선사 본문의 한 구절일 것이고, 선랑고사ㆍ화랑세기 등은 곧 신라 이래의 선배를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간혹 그것을 초록(抄錄)한 것이 있으나 이는 모두 의로운 다툼에 공이 있는 화랑의 졸도(卒徒)들뿐이고, 3백여 화랑, 낭도(郎徒)의 스승들은 하나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도 김부식이 화랑을 말살하려는 심리가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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