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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왜구 격퇴, 선비 정복 - 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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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왜구倭寇 격퇴


왜(倭)는 일본의 본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北海道)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大和族)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음에 화(和)ㆍ(倭)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광개토왕릉비 1광개토왕릉비 1

(출처 : 吉林旅行豆腐账之——集安)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규슈本州ㆍ시코쿠四國ㆍ규주九州)에서 고기 잡고 사냥으로 생활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縫織)과 농작(農作)과 그 밖의 백공(百工)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假名) 곧 백제의 이두자(吏讀字)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假名)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자라는 것이다.


왜가 이처럼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빼앗김을 통분히 여겨 기원 391년(광개토왕 원년)에 왕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 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5년(기원 395년)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沿海)와 연강(沿江)의 일팔성(壹八城)ㆍ구모로성(臼模盧城)ㆍ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ㆍ관미성(關彌城)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彌鄒城)ㆍ야리성(也利城)ㆍ소가성(掃加城)ㆍ대산한성(大山韓城)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阿利水(지금의 월당강月唐江)를 건너 백제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다급하여 왕제 한 사람과 대신 열 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천 명,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고 ‘노객(奴客)’의 맹서(盟書)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蛇山(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新慰禮城)’이라 일컬었다. 


광개토대왕 정복활동 지도광개토대왕 정복활동 지도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倭兵)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機先)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임나가라任那加羅(지금의 고령高靈)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 407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水戰)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고구려 신라 구원전고구려 신라 구원전

(출처 : 금관가야를 몰락시키고 왜를 물리치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환도丸都 천도遷都와 선비鮮卑 정복


광개토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인물이지마는 동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만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백제를 공격함은 그가 왜와 결탁함을 미워해서이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쪽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奉天省)ㆍ직예성(直匠省) 등지를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남쪽에 대한 전쟁은 늘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쪽의 전재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제5의 서울인 안시성安市城(지금 개평蓋平) 부근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여 년 전쟁에 계속하여 매양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 마침내 요동으로부터 요서遼西(지금의 영평부永平府)까지 차지하니, 상승(常勝)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도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燕王) 성(盛)ㆍ희(熙) 등 지나 역사상 일대의 효웅들이 다 꺾여서 할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떼어주어 광개토왕이란 그 존호(存號)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진서(晉書)에 겨우 


"태왕(太王 : 好太王)이 연 평주(燕平州)의 숙군성(宿軍城)을 침노하므로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달아났다."


고 기록하였을 뿐이고, 그 외에는 도리어 연(燕)이 상승한 것으로 기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춘추(春秋)에 적(狄)이 위(衛)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지 않음과 같이 외국과의 전쟁에 패한 것을 숨기는 것은 지나 사관(史官)의 상례거니와 당시 이 모용씨(慕容氏)의 연이 멸망하고 척발씨(拓跋氏)의 위(魏)가 강성하였음도 호태왕이 연을 공격한 것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東晋)의 유유(劉裕)가 일어나서 선비족(鮮卑族)과 강족(羌族)을 이기고 송고조(宋高祖 - 앞서 말한 유유劉裕)가 황제 될 터를 닦은 것도 호태왕의 연을 공격한 것과 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인데, 저들이 그 완고하고 편벽된 상례를 지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 5세기 초의 지나 대국(大局)의 변화한 원인이 가려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 2광개토왕릉비 2

(출처 : 吉林旅行豆腐账之——集安)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晉書)완 달리 곧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데 선비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輯安縣)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筆談)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길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譆 : 역시 만주 사람)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기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의 정작 선비(鮮卑)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平州)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전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북위 북연 고구려북위 북연 고구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신(燕臣)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이고, 고구려의 선왕의 서손(庶孫)으로 연에서 벼슬하던 고운(高雲)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北進) 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호태왕은 기원 375년(백제 근구수왕 원년)에 나서 기원 391년에 즉위하여 413년에 돌아가니 나이 39살이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 현 북쪽 2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21척(폭 4척 7촌 ~ 6척 5촌)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榮禧)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印行)하였는데 비석에 떨어져 나간 글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해서 팔았으나 그 떨어져 나간 글자를 혹 석회로 발라서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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