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근구수왕의 대륙 백제와 일본 성덕태자-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30.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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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 후의 해외海外 경략經略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遼西)ㆍ산동(山東)ㆍ강소(江蘇)ㆍ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晋平郡)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 略有遼西晋平郡).”고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부여(扶餘)가 처음에 녹산(鹿山)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燕)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륙 백제의 흔적. 아직은 근거가 부족대륙 백제의 흔적. 아직은 근거가 부족


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軍國) 대사를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北京)을 빼앗아 요서(遼西)ㆍ진평(晋平)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鹿山(지금의 합이빈(哈爾濱))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에서는 진왕(秦王) 부견(符堅 : 역시 선비족)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山東)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피곤하게 하였으며, 남으로 지금의 강소ㆍ절강성 등지를 차지하고 있는 진(晋)을 쳐서 또한 얼마간의 주군(州郡)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한 것이다.


백제 요서경략설백제 요서경략설


그러면 진서(晉書)나 위서(魏書)나 남제서(南齊書)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 지나에 들어가 주인 노릇 한 모용씨의 연(燕)이나 부씨(符氏)의 진(秦)이나 척발씨(拓跋氏)의 위(魏)나 근세의 요(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 같은 것은 저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하므로 그 공업(功業)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뿐더러 당태종(唐太宗)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노하여 핍박할 때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해 양국의 지나 침입 기록을 없애버리고는 조선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의 소유였다고 위증(僞證)하니, 진서는 당태종 자신의 저서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백제 근구수왕의 대 지나 전공(戰功)을 뺐을 것이고, 위서ㆍ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것이므로 또한 구수왕의 서정(西征) 이야기를 뺐을 것이며, 오직 양서(梁書)나 송서(宋書)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疏略)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流傳)된 것일 것이다.


거품으로 가득찬 당태종거품으로 가득찬 당태종

(출처 : 中国历代君王作证:葡萄酒不是舶来品)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뺐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렸기 때문이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여 년은 태자로, 10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백제서기百濟書記(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나 나(단재 신채호)는 일본사의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 성덕태자 화상일본 성덕태자 화상

(출처 : 走在黑暗中的卫道士:从《九怨》谈日本阴阳师)


근구수의 근(近)은 음이 ‘건’이니 백제 때에는 성(聖)을 ‘건’이라 하였으므로, 근초고ㆍ근구수ㆍ근개루(近蓋婁)의 근(近)은 다 성(聖)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수(仇首)는 음이 ‘구수’, 구수는 마구(馬廐)를 일컬음이므로 일본 성덕태자의 성덕(聖德)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近)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간 언저리에서 났으므로 구호(廐戶)로 이름했다고 하는 것은 근구수의 구수(仇首)를 본받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했다.’고 하는 것과 ‘불법(佛法)을 들여갔다.’고 하는 것도 다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기원 384년) 9월“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빙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만은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 383년이요, 침류왕 원년 기원 384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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