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조선상고사 한자 이두문 관계-통일되지 못한 이두문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7. 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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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 한자漢字의 수입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조선상고사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의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金簡玉牒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國書’, ‘향서鄕書’ 혹은 ‘가명假名’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通俗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薛聰이 지은 것이라 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진흥왕 巡狩碑 따위)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詩歌가 있으니,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 없다.


이집트 문자이집트 문자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王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儉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樂浪이라 번역하여 낙樂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기원전 10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거란 문자거란 문자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文字가 되고 형자形字가 진보하여 음자音字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듦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偏傍(글자의 한 부분)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듦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 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女眞文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1. 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지금 ‘ㄱ’과 모음 ‘ㅏ'의 음철音綴이요, '라'는 자음 'ㄹ’과 모음 ‘ㅏ’의 음철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 ‘加’ ‘家’로 쓰고, ‘라’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音字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2. 음표音標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白자 한 자를 ‘백활白活’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爲白濟’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며, ‘이矣’자 한 자를 ‘의신矣身’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敎矣’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칙準則이 없으며,


3. 상음하몽上音下蒙의 이치를 획청劃淸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 ‘월이月伊’라 쓰지 않고 ‘월리月利’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 ‘풍이風伊’라 쓰지 않고 ‘풍미風味’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根幹과 지엽枝葉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거란 문자 요나라 옥새거란 문자 요나라 옥새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다.


다른 시대, 다른 지방 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시대)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利器가 될 수 있으랴?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지 1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청나라 옹정제 시기 금간옥첩청나라 옹정제 시기 금간옥첩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外患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敵國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썼다.


삼조선三朝鮮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 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才智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출처 : 조선상고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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