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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종 조광의 -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7. 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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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용호상박의 명장들, 장개충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光義 -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


976년 10월 송나라 태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조광의(이후 조경炅으로 개명)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태종이다. 당시는 북송이 건국된 지 17년밖에 안 되었기에 모든 면에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대 때에 형성된 할거체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송의 동남지역은 전류錢鏐가 오월吳越에서 칭제하고 있었고, 진홍陈洪은 장천漳泉을 점거하였으며, 서북 지역은 북한北漢이 태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송태종 조광의 화상송태종 조광의 화상

(출처 : 赵光义)


북송이 단지 후주의 뒤를 이어 여섯 번째 단명 왕조가 될 것인가 여부가 북송 통치자 앞에 놓여 있었다. 송 태종은 '국가 창업에 노력하고, 정치에 열중하여 천하의 정무에 게으름 없이 몸소 임했던' 태조의 업적을 본받아 송나라의 무궁함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송 태종 즉위 후 얼마 뒤에 절박한 심정으로 신하들에게 정사를 논하라는 특별 조령을 내리고, 상주하려는 자를 직접 소견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군신들에게 직언토록 하였다. 문무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백성의 이로움과 병폐 및 시정의 득실을 들으면 상서하여 직언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991년에 백관이 순서대로 황제의 하문에 웅대한 제도를 회복하고 기거 일마다 항상 두 명의 상참관常參官이 응대하고 벌문사伐問司가 그 장주를 접수하도록 하였다. 군신들의 상주문을 송 태종이 직접 일일이 살피니 "말한 바가 받아들여지면 반드시 상을 내리고,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죄를 더하지 않았다."


금 막대기로 신하를 혼내는 송태종금 막대기로 신하를 혼내는 송태종

(출처 : 宋太宗金牌调寇准)


또한, 태조가 거인들을 직접 시험했던 방법을 본받아 시제를 내고 진사와 제과를 복사하였다. 977년, 1과에서 500명이 합격했으니 전에 없이 많은 합격자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송 태종은 시종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짐은 박식한 인재를 시험에서 선발하되, 열에 다섯이 뽑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한둘에 그쳐도 정치 도구로 삼을 수 있다"


송나라 초에 상참관常參官의 제수는 모두 중서성中書省에서 결정했다. 981년에 차견원을 설치하여 상참관으로서 외지에서 임직하다 돌아온 자를 모두 차견원差遣院에서 "시험 성적과 인품 도량에 따라 중서성에서 빠진 인원을 분류 결정하여 임용하였다" 이후로 송 태종은 관원의 시험과 제수에 관여했다.


991년, 태종은 대리시大理侍나 형부刑部 관리들이 법을 마음대로 운용하여 판결할까 우려한 나머지 특별히 심형원審刑院을 설치하였다. 각지에서 상주한 소송 사건을 모두 심형원으로 넘겨 기록, 날인한 후, 대리시나 형부로 넘겨 검토하도록 하고, 검토가 끝나 황제에게 상주하면 다시 심형원에 넘겨 상세히 심의토록 했으며, 다시 황제의 재결을 거친 뒤에야 중서성으로 넘어갔다. 판결이 부당하면 재상이 상주토록 하고, 따로 논의 결정토록 했다. 이에 재상의 직무가 하나둘씩 황제에게 넘어갔다.


정사를 논하는 송태종정사를 논하는 송태종

(출처 : 바이두 이미지)


형옥의 남발을 막기 위해 백성들이 신문고를 두드리면 태종이 직접 듣고 판단하였다. 동시에 경성에 압송된 죄수를 직접 심문하였다. 993년, 경기 지역의 백성 모휘牟暉가 신문고를 울렸다. 태종이 물으니 모휘가 돼지 한 마리를 잃었다 하였고, 돈을 주어 물어줬다.


송 태종이 재상에게 이일을 말하며


"이처럼 사소한 일을 짐이 듣고 결정했소. 웃을 일이지만 이 마음으로 천하에 임하면 원망하는 백성은 없을 것이오"


라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송 태종이 경성에 압송된 죄수를 심문하는데 날이 저물었다. 시봉하던 신하가 노고가 많다고 여기니 태종은


"그렇지 않소. 무고함을 살펴 소송이 공평해지고 억울함이 없다면 짐의 뜻에 깊이 부합되는 것인데, 어찌 힘이 들겠소!"


라 하였다 한다.


태종은 재위 22년간 해 뜰 무렵 어전에서 아침을 맞아 정사를 살피다가 해가 져야 끝냈다. 또한, 숭정전崇政殿에서 일하다 점심에 이르러 식사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부지런히 정치에 힘써 시종 나태함이 없었다. 그는 당나라 말기의 제왕들이 신하들에게 정사를 맡겨 천하 분열을 초래했던 교훈을 말하면서


"짐은 비록 덕이 전왕에 미치지 못하지만, 정사에는 감히 나태하지 않았다. 천하 일이 마차처럼 급할지라도 하루하루 듣고 판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을까를 걱정했다. 당나라 말기의 제왕들은 구중궁궐에 살며 민간의 고통을 어찌 알았겠는가! 매일 그것을 한 번씩 생각하면서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직접 천하의 모든 일을 결정하였고, 신하들은 교지를 따랐을 뿐이다.


송태종 인형물송태종 인형물

(출처 : 바이두 이미지)


그는 정사를 돌보는 틈틈이 전대의 사서를 찾아 안위치란安危治乱, 홍폐의 이유兴废之由 등을 총결하여 거울로 삼았다. 유신들에게 서적을 종류별로 분류케 하여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 권을 편하였다. 빠진 부분은 여가를 이용해 보충토록 했다. 대신 송기증宋琪曾은 "폐하는 옛것을 섬기는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책 보기를 즐겼으며, 매일 세 권을 읽으시니 피로하실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태종이 답하기를 "짐은 책 읽기를 좋아한다. 책을 읽으면 유익하고, 매번 전대의 흥망을 알 수 있으며, 경계가 되면 됐지 피로하지는 않다"고 하였다.


태종은 정사에 힘쓰는 한편, 사냥이나 주색을 경계하였다. 매를 잡는 개를 다 풀어주고 사냥하지 않았으며, 심야에도 책을 보면서 안으로 6궁(가족이 거주하는 동서 6궁)의 유혹을 피했다.


997년에 송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 승지承旨 송백宋白이 바친 제익의帝謚议에서 송 태종의 인재 등용, 형벌 관리, 과거제 등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 전대나 후대를 모두 빛나게 하였다'고 했다.


태종 20여 년의 재위를 통해 송나라는 단명 왕조의 액운을 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북송과 남송 3백여 년의 기반을 세웠다. 송 태종 자신은 직접 천하의 일을 살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논하고 백성의 아픔을 긍휼히 여기며 형법을 살폈던 업적으로써 역사에 빛나는 현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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