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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그리고 한사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3. 9. 11:36

한나라와 고조선, 그리고 한사군


연나라의 태자 단丹의 군사가 진군秦에게 쫓겨 요하 근처에서 어지럽게 흩어진 뒤에 위만은 이들 망명한 백성들을 거두어 해동海東에 집결시켰다. 진번을 병합하고 국경을 항복하면서 한나라의 외신국外臣國이 되었다.


요동 변경 밖 동북쪽으로 고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나라 무왕 때 은나라 왕족인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삼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 기자조선은 사십일 대까지 전해졌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곳으로 쳐들어가 조선왕 기준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기자조선의 강역기자조선의 강역

(출처 : 箕子朝鲜)


일찍이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로는 조선을 요동 국경 밖의 땅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도 조선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요동에 있던 요새를 새로 쌓고 패수浿水(대동강의 옛 이름)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燕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해 들어가자, 위만은 연나라에서 망명해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만이蠻夷 복장에다 상투를 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만이는 한인漢들이 중국 남쪽과 동쪽에 있던 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후, 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를 건너서 본래 진나라 때의 빈터였던 땅을 근거지로 삼아, 한나라의 요새 부근을 왕래하면서 점차로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그 전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모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왕검王儉(평양)에 도읍했다.


혜제, 여후 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군 태수 위만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선 밖 만이를 막고 변경지대에서 약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여러 만이의 군장郡長들이 한으로 들어가 천자를 뵙고자 하는 경우에도 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태수 위만이 이런 뜻을 상주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위만조선의 강역위만조선의 강역

(출처 : baike.baidu.com)


이로써 위만은 점차 무력과 재력을 갖게 되어 근방의 소읍들을 침략해 병합했다. 황해도 자비령 이남과 한강 이북 땅의 진번과 함경남도 땅 임둔도 자진하여 복속해 왔으므로 위만의 영역은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 그 후 왕위는 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권유를 받고 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한나라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일찍이 입조해 천자를 뵈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진번 인근 사람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 싶다고 했지만, 한나라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원봉 2년(bc 109)이었다.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파견해 우거에게 귀순하라고 타일렀지만 우거는 듣지 않았다. 섭하가 조선을 떠나 경계인 패수에 임했을 때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장裨王長을 찔러 죽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섭하는 급히 패수를 건너 수레를 몰아 요새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귀국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말을 듣지 않기에 조선의 장將을 죽이고 왔습니다."


황제는 섭하의 행위를 가상히 여겨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섭하는 자신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기뻐하며 임지로 갔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지난날 비왕장을 죽인 일에 분노하고 있던 참에 군사를 동원해 습격해 가서 그를 죽였다. 이 급보가 장안으로 전해지자 무제는 진노하여 나라 안의 죄수들로 병사를 모집해 조선을 치게 했다.


그해 (bc 108) 가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병력 5만을 주어 제齊에서 발해渤海(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둘러싸인 바다, 서해)로 배를 띄웠다.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으로 출격하여 조선왕 우거를 공격케 했다. 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사를 동원하여 험준한 지점에서 방비를 튼튼히 했다. 드디어 좌장군의 졸장卒長 다多가 우거를 공격했으나 철저히 깨어져서 도망했다. 다多는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했다. 누선장군 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을 이끌고 왕검성으로 육박했다. 우거는 우선 왕검성을 굳게 지켰다. 그런데 우거는 양복의 군사가 소수임을 알아차리고 성에서 나와 양복의 군사를 들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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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의 군사는 대패하여 산중으로 도망치고 십여 일 동안 숨어있다가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일단 군대를 재편성했다. 한편 좌장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한 뒤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양복과 순체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조선군은 뜻밖에 강합니다.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우리는 병력의 숫자로 과시 위협하는 한편, 위산衛山을 시켜 항복을 권고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서 위산이 천자의 사절로 조선의 우거왕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우거왕은 전쟁을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이 우려되어 항복하기로 하고, 태자로 하여금 위산과 함께 한나라에 입조시켜 사과케 하는 한편, 말 5천 필과 군량미를 보내기로 했다. 태자는 군사 1만여를 데리고 패수를 막 건너려는 순간 좌장군 순체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태자는 이미 항복하지 않았소. 군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하시오."


태자 역시 순체의 완강한 요구를 듣는 순간 또한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소. 좌장군께서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믿겠소."


그래서 태자는 패수를 건너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은 다시 조선으로 갈 수도 없어 조정으로 돌아와 복명하였다. 무제는 진상을 밝힌 다음 위산이 일을 그르쳤다 하여 즉시 그를 참형에 처하고 전선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 양복과 순체, 두 장군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공격을 다그치게 했다. 일이 다시 어긋난 순체는 군사를 몰아 패수를 건너 왕검성 밑으로 박두했다. 양복 또한 군사를 몰아 성의 남쪽에다 포진했다. 그러나 왕검성 수비가 견고했으므로 두 장군은 수개월을 허송세월한 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조선군 상상도조선군 상상도

(출처 : 卫氏朝鲜)


순체는 본래 궁중에서 황제를 측근으로 모시며 총애받던 신하였다. 연나라 대代 땅의 사나운 용사들을 이끌고 온 군사들이었으므로 그들 모두가 자존심이 강했지만 교만했다. 또 양복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자주 패전하여 이미 많은 병사를 잃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미 우거를 겁먹고 있었고 양복은 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거를 포위하고 싸우는 한편 언제나 화친을 맺자며 회유했다.


양복은 화친을 원하고 순체는 왕검성을 자주 급습해 왔으므로 우거는 두 장군의 군략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첩자를 풀어 한군의 사정을 정탐하도록 했다. 우거는 한편으로 화친을 원하는 양복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한다는 밀약을 통보하면서도 계속 미적거리며 시일을 끌고 있었다. 순체는 부하를 양복에게 보내 공동작전을 펴자고 했으나 양복은 일부러 순체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서둘러 조선의 항복 문서를 받아 그 공로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순체는 양복의 그런 기미를 알아채고 조선의 허술한 틈을 찾아 협박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았다. 차라리 조선은 양복 쪽에게 마음이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두 장군은 서로 화합할 수가 없었다. 순체는 불평했다.


"누선장군은 많은 군사를 희생시킨 죄가 있다. 그런데 이제는 조선과 몰래 친하여 우호하고 있지 않는가? 양복은 모반을 꿈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음속으로 생각할수록 그게 사실인 양 믿어졌다. 본국의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


"조선에 간 두 장군은 진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산을 보내 우거에게 항복을 권유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우거는 위산에게 분명히 항복하여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겠다고 했다. 위산은 누구인가? 일개 사자 아닌가. 위산이 혼자서 결정을 못 내리고 순체와 의논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쳐 항복 약속을 망친 것이다.


이제 두 장군이 왕검성을 포위하고는 있지만 의견이 서로 다르고 화합하지 못하니 함락은 이미 글러 버렸다. 어느 세월에 해결을 보겠는가?"


그래서 황제는 제남군 태수 공손수濟南太守 公孫遂를 파견했다. "서둘러 가서 사태를 바로 잡아라. 옳다고 판단되면 적절히 처리할 것을 허락한다." 공손수는 도착하는 대로 순체를 먼저 만났다.


한무제 유철 일러스트한무제 유철 일러스트

(출처 : 投票就送百元充值卡和千元礼包?!《卫子夫》二轮大放血)


"조선은 마땅히 이미 항복했어야 했소. 또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니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뭐요?"

"그것은 누선장군 때문이오. 함께 계략을 짜자며 아무리 타일러도 날 만나주지 않고 있소."

"그건 왜 그렇소?"

"그는 군사의 대부분을 잃었소. 귀국하면 죄를 받을까 그것이 두려워 조선과 모의해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우거는 항복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틀림없는 사실이오?"

"사태를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가 큰 해를 입을 것입니다. 누선장군이 조선군과 힘을 합치면 우리 군사는 마치 벼랑에 떨어져 지리멸렬할 것이오."

"그렇다면 적절한 조처를 할 수밖에 없지!"


공손수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양복을 순체의 진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공손수는 양복이 도착하자마자 가차 없이 체포해 감금해 버리고 양복의 군사들을 순체에게 병합시켜 버렸다. 공손수는 귀국해 그 일을 황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무어라고! 적절한 조처라는 게 겨우 그것이오. 양복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순체의 말만 들어 그를 체포한 것이 감히 그대가 할 짓인가?"


황제는 노하여 공손수를 주살해 버렸다.


한편 순체는 기왕에 양군을 통합하자마자 즉시 조선을 급습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노인路人과 한음韓陰, 그리고 이계이계의 재상 참尼谿相參, 또 장군 왕협王唊 등이 모여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애당초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그는 지금 체포되어 버렸소. 사나운 좌장군이 양군을 병합했으니 이제 전투는 더욱 치열하고 급박해질 것이오."


"무엇보다도 저들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점이오. 그런데도 우거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고 있소."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죽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결국, 한음과 왕협, 노인은 한나라 진영으로 도망쳤다. 그중 노인은 우거군에게 붙잡혀 피살되었다. 원봉 3년 여름이었다.


중국에서 추정한 한사군 위치중국에서 추정한 한사군 위치

(출처 : 归还所占辽阳土地换中国同意南北统一)


이계의 재상 참이 드디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했다. 그러면서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대신 성이가 우거를 대신해 조선의 명예를 걸고 굳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순체는 조선왕이었던 우거의 아들 장長과 재산 노인의 아들 최最를 회유시켜 성이를 주살하도록 백성들에게 권고토록 했다. 그래서 성이는 성안에서 피살되고 조선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 첩보가 올라가자 무제는 조선에 4군郡을 설치했다. (bc 108)


원조선, 곧 지금의 청천강 이남 황해도 자비령 이북 땅에 낙랑군, 그리고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 땅에 진번군과 함경남도 땅에 임둔군, 동가강 곧 훈하 유역에 현도군 이렇게 네 개 군을 두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폐합을 거듭하다가 광개토대왕 때 현도군이 고구려에 병합됨으로써 소멸하였다.


이 당시 한나라의 사정을 알아보자. 조선을 평정한 후, 조선왕 우거를 죽인 참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한나라 진영으로 도망쳤던 한음은 추청후로, 왕협을 평주후로 삼고, 조선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대신 성이를 죽인 장을 기후로 삼고, 최는 아버지가 피살된 데다 공로가 컸으므로 온양후로 봉해졌다.


좌장군 순체는 황제에게 불려가 공로를 다투고 질투해 전략을 배반한 죄로, 처형 후 시체를 길바닥에 버리는 기시형에 처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대동강구에 이르러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전진해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주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이처럼 한나라는 5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범하여 일 년 이상 전투를 벌였으나 결코 승리했다고 할 수 없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을 점령하지도 못했고,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의 항복을 받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한나라의 군사력이었다기 보다는 친중국 정책을 주도하였던 주화라고 할 수 있다.


좌장군 순체좌장군 순체

(출처 : 荀彘)


그리고 특히 전쟁에 참여하였던 지휘관들이 모두 참형에 처하거나 가혹한 형별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한 원정 실패가 아니라 패전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나라는 기존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지만, 행정적으로 실효적으로 지배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한사군의 성립조차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행정 범위에서 벗어난 완전히 독자적인 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한사군은 문헌상 단지 32년 동안만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번군의 경우 기원전 108년에 세워져 기원전 82년에 폐지된 것으로 후한서에 나와 있으며, 현도군 역시 기원전 75년에 그 위치를 옮겼다. 임둔군은 언제 폐지되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으나 진번군과 같이 폐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짧은 시기에 행정관을 파견하여 실효적인 지배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전쟁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조선과의 전쟁은 분명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고조선은 한나라에 맞서 일 년 이상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친중국 정책을 폈던 주화파 역시 중국의 실효적 지배를 막고, 우리 민족이 다시 힘을 기를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면에서 나름대로 의의는 있을 것이다.


결국, 한사군은 단지 이름뿐인 지명이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그곳을 지배하고 영위하였던 것은 우리 민족이었다.


출처 - 초한지와 삼국지를 이어주는 전한, 후한지, 장개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