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일본 천지천황이 참여한 백제 부흥전쟁 2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2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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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참패의 원인을 '불관기상不觀氣像'과 '난오중군지졸'에 돌리고 있다. 백제왕과 일본 군장 모두에게 공동의 책임을 지우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극심한 백촌강 입구의 형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세도 제대로 못 읽은 채 오합지졸로 정예병으로 구성된 나당연합군에 맞섰으니 패배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백제 의병들은 "주유성도 무너졌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써 다했으니 어떻게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며 일본 망명을 결심했다. 9월 11일 모궁牟弓을 출발하여 13일 궁례弓禮에 이른 뒤 침복기성枕服岐城(시무부쿠기사시)에 있는 처자들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663년 9월 24일 마침내 일본으로 향했다고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에 기록되어 있다.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의 이름이 그때의 망명 명단에 등장한다. 이들은 현재 태재부시太宰府市(다자이후시) 배후에 해당하는 축자국에 대야성과 연성을 쌓았다.


다자이후의 천만궁太宰府天滿宮다자이후의 천만궁太宰府天滿宮

(출처 : 太宰府天滿宮)


일본 다자이후시 위치일본 다자이후시 위치


제38대 천지천황은 이들 백제 망명객들에게 대금하 이하 소산하에 이르는 관직을 주었다. 몇몇은 법관대보, 학식두에 임명되었다. 특히 병법, 해약, 오경, 음양 등에 통달한 이들은 상류 지식인층에 속해 7세기 일본의 지식문화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천지천황의 백제 부흥전쟁 참전이 있던 시기(662-663)를 돌아보면 참으로 특이한 데가 있다. 중국의 당나라는 그 당시 건국 후 44년째였다. 정관의 치로 알려진 당태종의 성공적인 치세가 끝나고 그의 9남인 고종이 즉위하여 13년째를 맞고 있었다. 34세의 나이였지만 병환이 깊어 황후 측천무후가 대신 대권을 쥐고 있을 때였다.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역사를 단절시킨 후 주周나라로 나라 이름을 고쳐 스스로 중국 최초의 여황제에 오르게 되는 불세출의 여걸이다.


진왕이었던 당 고종 이치진왕이었던 당 고종 이치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신라는 당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장남 김법민이 제30대 문무왕에 올라 있었다. 나당연합군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무찌르고 천하 통일 이루고자 나당외교에 혼신을 다 기울였던 통일의 화신이 바로 김춘추였다. 이역만리 당나라를 수없이 오가며 당태종과 당고종을 줄기차게 설득했다. 그런 김춘추가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킨 후 59세에 타계하자 35세 된 그의 장남이 문무왕에 올랐다.


문무왕은 67세를 넘긴 백전노장 김유신에게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을 단숨에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고구려 정벌이 다급한 마당에 백제의 잔당들에게 발목이 묶여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무왕은 백제, 고구려를 완전히 설명한 후 엉뚱한 욕심을 내며 식민통치를 획책하는 당나라를 마저 물리치고 마침내 51세 되던 해(677)에 완전통일을 이룩했다.


천지천황이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해 대규모 군단을 파병한 시기가 바로 동북아의 대전환기였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무씨 왕조건설의 야심이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신라 문무왕의 천하 통일 의지가 고구려와 당나라를 향해 힘차게 내뻗고 있을 때였다. 천지천황은 그 격변기에 전망이 대단히 불투명한 백제 풍장왕 부여풍을 돕기 위해 수만 군대를 파병하고 수천 군선을 급파해 주었다.

부여융의 묘지석. 의자왕의 태자부여융의 묘지석. 의자왕의 태자


조국 백제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만 부여풍은 당나라 지원군과 함께 재입국한 맏형 부여융과 대결해야 했다. 결국, 모든 꿈이 다 수포로 된 뒤 당나라에 끌려가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부왕과 맏형은 당나라 귀족으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다 수도 장안에서 죽어 이역만리에 묻혔다. 부여풍은 죄인이 되어 인적이 드문 변방에 묶여 있다가 그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부왕 의자왕은 백제 멸망 직후 소정방에 이끌려 당나라에 입국한 뒤 곧 병사했다. 하지만 맏형 부여융은 50세부터 10년간 웅진도독을 지내며 당나라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마음고생을 하다가 다시 당나라에 입국하여 광록대부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에 봉해졌다.


67세로 타개하여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맏형 부여융은 죽어서야 산으로 갔는데 동생 부여풍은 살아서 오령으로 귀양 갔다.


부여풍의 이름에는 풍년을 가리키는 풍豊자가 들어있다. 풍자는 의식에 쓰는 굽이 높은 그릇을 본뜬 글자다. 콩 두豆자를 중심에 실어 놓은 글자다. 콩 두자 또한 의식용 그릇을 본뜬 글자다. 결국, 부여풍은 의식에 올려지는 그릇처럼 7세기 중엽의 대격변에 휘말려 꼼짝없이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릇 따위가 어떻게 거친 운명의 파도를 넘어 재가 바라는 곳에 이를 수 있는가? 그나마 전쟁의 참화 속에서 비참하게 죽지 않은 것이 그가 일본땅에서 쌓은 불심佛心 대문이고 불력佛力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더욱이나 풍년 풍은 바람 풍風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백제의 멸망 과정백제의 멸망 과정


바다 건너 일본땅에서 30여 년 가까이 살았다면 그야말로 바람 같은 일생이 아닌가? 풍랑을 끼고 살아야 하는 파도 위의 돛단배 같은 운명이었다.


반대로 부여융은 융隆은 욱일승천하는 기상을 지닌 글자가. 많은 왕자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어 죽거나 다쳤지만 오로지 부여융만은 태자가 되어 일찍부터 예외적이고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45세에 나라가 망하는 꼴을 생생히 체험했지만 50대에는 비록 웅진도독이지만 조국 강토의 수령이 되어 십여 년간 다스렸다.


운명으로 보면 이래저래 왕 노릇을 한 셈이 된다. 그리고 당나라 가서도 대방군왕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조국 백제와 당나라 양쪽에서 왕 노릇을 한 것이다. 모두가 망한 마당에 얼마나 강한 운세이면 그토록 승승장구했겠는가? 보통의 운세가 아니다.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67세로 생애를 마감하고 천하를 내려다보는 낙양의 한 산중에 묻혔다. 그 또한 범상치 않은 팔자다. 죽이 묻히는 곳이 바로 유택이라면 그는 죽어서도 아주 특별한 곳을 차지한 것이다.


부왕 의자왕의 이름은 바로 의자義慈다. 나라를 멸망시킨 왕이라 시호가 특별히 없다. 그래도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 일찍부터 해동증자로 일컬어졌다.


백제 의자왕 영정백제 의자왕 영정


부왕인 무왕처럼 잦은 전쟁과 큰 공사 등으로 재정을 고갈시켜 국운을 점차 쇠락하게 했다.


부자父子가 반세기(600-660)에 걸쳐 신라를 심하게 몰아붙이자 국가존망의 위기에 봉착한 신라가 최후수단으로 당나라의 지원을 끌어냈을 수도 있다. 의자왕 스스로 왕이 되자마자 신라를 직접 공격하여 신라의 수도 경주를 위협하며 40여 개 성채를 빼앗았다.


당항성黨項城(남양)을 함락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나가는 통로 자체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무왕의 이름은 벼슬을 상징하는 "반쪽 홀" 장璋이다. 의자왕의 이름은 의자義慈다. "변함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효심과 형제애가 유달리 깊었다.


무왕의 이름은 '벼슬이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탓인지 외화外華에 치중하다 국고를 지나치게 탕진했다. 반면에 의자왕은 늘 변함없는 큰 사랑이라는 이름처럼 낙화암 3천 궁녀로 이미지가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남다른 사랑과 사치가 결합하여 나를 망쳤다는 것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되고 말았다.


경치 좋은 북망산 전경경치 좋은 북망산 전경

(출처 : 邙山,洛阳北面的天然屏障)


백제 부흥군을 도와 신라와 당나라에 맞서 싸워준 천지천황의 천지라는 연호가 참으로 특이하다. 그 많은 천황 중에서 하늘 천天자가 들어간 연호를 사용한 천황은 오직 두 차례뿐이다. 38대 천지천황과 40대 천무천황 뿐이다. 38대 천황은 '하늘의 뜻'이다. 40대 천황은 '하늘의 기운'이다. 하늘의 뜻, 하늘의 마음을 상징하는 천지천황이 부여풍의 조국 수복전쟁에 수만의 군대를 보내준 것이다. 역사라고 해서 그저 컴컴한 서고 속에 묻어둘 일이 아니다. 언제 꺼내 보아도 그 속에 아주 특별한 의미들이 가득히 들어있다.


심지어는 백제라는 국명을 놓고도 '백 가지 씨족氏族이 대륙에서 건너와 세운 나라'라서 일백 백百자에 건널 제濟자로 국명을 정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있을 정도다. 특히 한자는 온갖 생각과 관찰을 글자 하나 하나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들여다볼수록 무시무시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글자마다 '보고자 하는 것만큼 볼 수 있는 오묘한 그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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