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일본 천지천황이 참여한 백제 부흥전쟁 1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9.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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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미로 읽는 일본 역사의 비밀, 이우각


38대 천지천황의 백제부흥전 참전쟁


한반도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는 660년 여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여성천황인 제37대 제명천황(齊明天皇, 사이메이천황 재위 655.1-661.7) 말기에 있었던 국제적 대변란이었다.


일본 서명천황舒明天皇일본 서명천황舒明天皇


34대 서명천황(舒明天皇, 죠메이천황 재위 629.1-641.10) 치세기간에 일본에 와있던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병사)의 왕자 부여풍은 그동안 36대 효덕천황의 치세기간에 전개된 대화개신大化改新의 급한 물결을 가까이서 체험하고 있었다. 천황주권의 회복을 위해 일대 개혁을 단행하는 대화개신의 주역들을 보며 느낀 바가 참으로 많았다. 한데 여성천황인 제명천황 치세 밑에 참담한 비보를 듣게 되었다. 조국 백제왕국이 신라와 당나라의 13만 연합군에 무참히 짓밟히고 충신열사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부왕과 대자 부여융(扶餘隆, 615-682)을 비롯하여 1만 3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당나라에 붙잡혀 갔다고 했다. 왕자 부여풍은 안절부절못하며 천황을 비롯하여 조정중신들과 조국의 운명을 놓고 날마다 논의를 거듭했다.


그때 낭보가 날아들었다. 달솔겸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 흑치상지黑齒常之를 비롯하여 왕족인 좌평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이 수만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임존선과 주류성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빨리 귀국하여 왕에 오르라!'는 소식이었다.


흑치상지는 3만여 패잔병을 이끌고 2백여 개의 성을 이미 회복했다고 했다. 부여풍은 제38대 천지천황(天智天皇, 재위 661.7-671.12)에게 귀국에 즈음하여 고국의 전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천황은 5천의 군사를 내주며 '백제를 반드시 되찾아 훌륭한 임금이 되라!'고 격려했다. 631년에 조국을 떠나 662년에 구원군을 이끌고 패망한 조국에 도착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간간이 귀국하여 조국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완전한 귀국은 자그마치 31년 만이었다.


흑치상지, 백제의 배신자흑치상지, 백제의 배신자


왕자 부여풍은 풍왕으로 즉위하여 조국 회복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임존성과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고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불퇴전의 항전을 거듭했다.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통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풍왕은 수만의 백제 부흥군과 5천의 일본지원군을 이끌고 신라의 일방적인 통일 전쟁에 결사 항전하고 있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수세에 몰리자 신라군 총대장 김인태를 돕기 위해 신라 왕 태종무열왕이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달려왔다.


당나라는 유인원의 다급한 지원요청 때문에 유인궤와 손인사를 보내 지원하게 했다. 먼저 흑치상지가 유인궤의 회유에 넘어가 당나라 군대에 귀순하고 말았다. 흑치상지가 돌변하여 당나라 군대와 함께 자신들을 공격하자 백제 부흥군은 적전분열을 일으키고 말았다.


먼저 좌평 복신이 스스로 상잠장군을 자처하며 승려 도침을 살해했다. 풍왕 부여풍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복신의 음모를 알고 선제공격을 가해 복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반면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대규모 지원군으로 사기가 충전해 있었다.


지수신은 임존성을 지키며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했지만 풍왕 부여풍은 일본의 지원군마저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한 마당이라 양자택일을 서둘러야 했다.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고구려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고구려가 통일전쟁에 승리하게 되면 조국을 수복하는 일이 그만큼 용이해 질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 판단마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660년 8월 백제 부흥군 거병660년 8월 백제 부흥군 거병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668)하자 마침내 당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당나라로 붙잡혀가 오령 이남으로 유배되었다. 조국을 되찾고자 와신상담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이역만리 험준한 벽지에 파묻혀 모든 걸 잊어야 했다.


고구려에 희망을 걸었던 자기 자신이 오히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조국 백제의 멸망과정은 일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일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게 되었다. 망명자의 눈으로 바라본 고구려는 그야말로 하루하루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력자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이 망해가는 고구려를 더욱 사분오열로 이끌었다.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아예 12성을 끌어안고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다. 설인귀의 당나라 수십만 대군과 김인문의 신라군 시삽 만이 평양성을 포위 중인데도 권력자들은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앞가림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풍왕 부여풍은 고구려의 멸망을 똑똑히 바라보며 당나라로 강제이주하는 고구려의 3만여 가구와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백강구의 위치백강구의 위치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은 4차례의 백강구전을 통해 나당연합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유인궤와 두상 등이 이끌고 온 당나라 수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결사항전이 되고만 663년 가을의 해전에 대해서는 구당서(945년 완성), 신당서(1060년 완성), 삼국사기(1145년 완성), 일본서기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주유성으로 나오고 좌평 복신의 성씨가 귀실鬼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나오는 백강구는 백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멸망한 백제를 수복하려 일본의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풍왕 혹은 풍장왕은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이 해외에 대규모 군선과 군대를 파병한 첫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었다.


나당연합군에 맞서서 결사항전을 벌여야 하는 비장한 전쟁이고 참전이었다. 여원군신(廬原君臣, 이호하라노 기미오미)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장병들이 백제 부흥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왕자 부여풍이 이끌고 온 5천 지원군 이외에 새롭게 파병된 대규모 군대였다. 풍장왕은 백강에 정박 중인 일본의 지원군을 영접하기 위해 나당연합군이 포위 중인 주류성을 몰래 빠져나가 백촌(白村, 하쿠스키)으로 향했다.


백제와 왜 연합군 패전백제와 왜 연합군 패전


이즈음 당나라 지원군 총대장 유인궤와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은 170여 척의 당나라 군선단을 이끌고 백강 앞바다에 정박 중이었다. 663년 8월 말경에 두 차례 격돌했지만 결과는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의 참패였다. 자그마치 일본 군선 4백여 척이 파손되거나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그때의 국제해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족히 짐작할 만하다. 이때의 해전을 끝으로 전쟁이 종반전으로 접어들어 9월 초에는 마지막 보루인 주류성마저 나당연합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의 합동 해전은 결국 4년간의 국제전쟁을 마무리 짓는 건곤일척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백척간두에 올라서서 건곤일척의 마지막 해전을 치른 것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당시의 국제해전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3차에 걸쳐 총 4만여 병력을 파병했다고 되어있다. 기록마다 시각차이가 뚜렷하지만 만일 4만여 병력을 바다를 통해 이역만리로 파병했다면 누가 보아도 대대적인 국제전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 군선 4백여 척이 불타거나 침몰하자 백강 입구는 그야말로 피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연기로 가득 찬 하늘은 마치 밤하늘을 방불케 했다. 7세기 중엽을 장식한 역사적인 대해전大海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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