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윤관 - 영광을 위해 오랜 시간 인내했던 인물 3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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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그러나 여진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듬해인 예종 3년(1108) 1월,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정병 8천 명을 이끌고 가한촌 좁은 길을 지나다가 매복해 있던 여진족의 기습을 받았다.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윤관을 비롯한 고려군은 포위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연총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윤관이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척준경이 순식간에 여진족 10여 명을 해치웠다. 곧이어 최홍정과 이관직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윤관은 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영주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


동북 9성 개척한 윤관동북 9성 개척한 윤관


윤관이 영주성에 머물고 있을 때 여진족 2만 명이 또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윤관은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니, 굳게 지켜야 한다"며, 철저하게 수비 위주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듣고 있던 척준경이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적의 군사는 자꾸만 늘어나고 성안에 있는 군량은 금세 바닥이 날 것입니다. 만약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어찌하려 하십니까? 장군들께서는 아무래도 지난날 싸움에서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잊으셨나 봅니다. 지금 내가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장군들께서는 성루에 올라 그 모습을 똑똑히 보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척준경은 결사대 수십 명을 데리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진족 쪽에서도 엇비슷한 규모의 군사들이 이에 맞서 나왔으나 이들은 척준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19명의 목이 달아났고, 기가 질린 여진족들은 줄행랑을 쳐버렸다.


동북 9성 두만강 이북 700리설동북 9성 두만강 이북 700리설


마침내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고 점령지에 9개의 성을 쌓았다. 이것이 바로 동북 9성이다. 동북 9성은 함주, 영주, 옹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으로, 윤관은 이곳에 남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때 윤관의 고려군은 여진의 전략적 거점 135곳을 무찔러 적군 4,940명의 목을 베고 13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윤관은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상서이부판사 군국중지사에 임명되고 자줏빛으로 수놓은 안구(말안장에 딸린 여러 가지 기구) 등을 하사받았다.


윤관은 그해 4월 개경으로 개선하여 예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윤관과 오연총이 부월을 바치자 예종은 문덕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이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패장의 멍에를 쓴 채 쓸쓸한 최후를 맞다


그러나 윤관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여진은 9성의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국경을 어지럽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으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연총이 나가 옹주에서 크게 물리쳤으나 이들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그해 7월,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선 윤관은 휘하 장수 왕자지와 척준경 등을 시켜 여진족을 물리쳤다. 그러나 여진은 침략을 멈추지 않는 한편, 영원히 고려를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이에 고려는 여진과 적극적인 강화 교섭을 시작했고, 예종은 6부를 소집하여 9성을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윤관은 동북 지방에 나가 있었다.


고려 기병 상상도고려 기병 상상도


당시 예종은 여진 정벌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던 예종은 한쪽에서 생사를 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군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자 우간의대부 이재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지금 나라에 사고가 잦고 백성들의 살림이 평안하지 못한데, 성상께서는 군신들과 어울려 매일 같이 주연을 베풀며 밤새도록 궁궐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니 백성들이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9성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절대 불가하오니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재가 예종에게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윤관과 같이 여진 정벌에 나섰던 임언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잠시 개경에 들렀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예종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정 신료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평장사 김경용이 잔뜩 취한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즉시 자리를 빠져나온 임언은 우간의대부 이재를 만나 긴 탄식을 늘어놓았다.


"동쪽 변경이 이렇듯 위태로운데 어떻게 평장사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춤을 출 수 있단 말이오. 조정의 내로라 하는 관료 중 이를 말리는 사람도 하나 없고 ..."


이에 이제는 자신의 책무대로 예종에게 직간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예종은 이재의 상소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해임했다. 이러한 예종으로서는 여진의 강화 요청이 내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여진정벌 후 성을  쌓는 장면 - 안재후 그림여진정벌 후 성을 쌓는 장면 - 안재후 그림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평장사 최흥사를 비롯한 대부분 대신이 9성 반환에 찬성했지만, 반대한 대신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9성 반환에 찬성한 대신들은 여진 정벌에 있어 한 길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맞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만만치 않을 것이며, 새로 개척한 땅이 도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을 기할 수 없으며,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예종 4년(1109) 7월 3일, 예종은 문무백관들과 의논하여 마침내 9성을 반환하기로 했고, 보름 뒤부터는 철군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을 비롯한 수많은 장졸이 목숨을 걸고 경략했던 9성은 다시 여진족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9성을 쌓은 지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9성의 반환으로 인해 사실상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윤관은 패장의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 작호마저 삭탈 당했다. 윤관을 시기하는 무리가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윤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윤관을 처벌해야 한다는 재상과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다행히 예종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탄핵당한 윤관의 사유탄핵당한 윤관의 사유


예종 5년(1110)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지만, 윤관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9성의 반환은 그의 의욕마저 꺾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자나 깨나 여진 정벌에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여진을 정벌하고 어렵게 쌓은 9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얼마 후 고려는 여진에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예종 10년(1115) 우야소의 뒤를 이은 아구다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금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였는데, 2년 뒤에는 국서를 보내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어 인종 3년(1125)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의 예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사사건건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집권자 이자겸 등이 금나라의 이와 같은 요구에 타협함으로써 고려의 북방정책은 일시에 좌절되고 말았다.


윤관이 살아 있었다면 땅일 치고 피를 토할 일이었다. 그러나 윤관은 이러한 치욕스러운 역사를 도저히 볼 수 없었는지 9성이 반환된 지 2년 만인 예종 6년(1111)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사후 삭탈 당했던 관작을 되돌려 받았으며, 문경文敬(후에 문숙으로 고쳐짐)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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