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윤관 - 영광을 위해 오랜 시간 인내했던 인물 2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6. 07:11
반응형

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해(1104년) 12월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별무반이라는 특수부대를 설치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만반의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별무반은 기병 중심의 신기군, 보병 중심의 신보군, 승병 중심의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는데, 말을 가진 사람은 기병인 신기군에 속했고, 보병인 신보군은 20세 이상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말이 없는 사람으로 조직되었다. 항마군은 사원에 예속된 하급 승려들을 징발하여 조직했다.


윤관의 진격로 동북9성의 위치윤관의 진격로 동북9성의 위치


이듬해 1105년, 윤관이 태자소보 판상서병부사 한림원사에 올라 한창 군사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숙종이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자신이 강력하게 추진해 왔던 여진 정벌과 남경 천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숙종은 죽기 얼마 전 태자 우(예종)와 총신 윤관에게 밀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저 북방의 오랑캐를 반드시 정벌하여 우리 고려의 영토를 넓히고 새 도읍지 남경에서 대 고려제국의 아침을 맞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는 바랄 것이 없노라."


숙종으로서는 비록 선위라는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조카를 내쫓고 등극했다는 정치적 부담과 이전까지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며 조공을 바쳐왔던 여진에게 두 차례나 패전한 치욕으로 인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당부한 것이다.


예종 즉위 후 윤관은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천수사의 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오연총과 함께 신기군과 신보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윤관은 예종에게 서경을 강의하고 옷과 띠를 하사받는 등 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연영전학사를 거쳐 상주국 감수국사에 올랐다.


인의로 거든 대승으로 9성을 쌓다


예종 2년(1107), 드디어 윤관은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여진 정벌에 나섰다.


어느 날 변방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여진이 멋대로 날뛰어 변성을 침입하고, 그 추장이 조롱박 하나를 긴 나무에 걸어 여러 부락에 돌려가며 보이면서 일을 의논하는데, 그 의중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이에 예종은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숙종의 밀지를 꺼내 대신들에게 보이며 여진 정벌의 뜻을 밝혔다. 숙종의 밀지를 읽고 난 대신들은 "성고(숙종)의 유지가 이처럼 깊고 간절한데 어찌 잊겠습니까?"라며 정벌에 찬성했다.


여진족과 고려의 관계여진족과 고려의 관계


그해 윤 10월, 정벌군 원수에 임명된 윤관은 "신이 일찍이 성고의 밀지를 받았고, 또 지금 이렇듯 엄명을 받았사오니, 어찌 삼군을 통솔하여 적의 보루를 깨뜨려 지난날의 치욕을 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출사표를 대신했다. 첫 출전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돌아온 이후 절치부심하며 여진 정벌을 준비해 왔고, 마침내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할 기회를 맞은 윤관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윤관이 애써 양성한 별무반 17만 명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자 예종은 서경까지 행차하여 그를 배웅했다. 국경 근처 장춘에 도착한 윤관은 행군을 멈추고 진을 쳤다. 지난번처럼 쓰라린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히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윤관은 먼저 막료들과 의논하여 병마판관 최홍정과 황군사에게 군사를 주어 정주와 장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포로로 데리고 있던 여진의 추장들을 풀어주겠다며 거짓으로 여진족을 유인했다. 틈을 보아 기습할 생각이었다.


이에 추장 고라 등 400여 명이 나타났고, 윤관은 술과 음식으로 우선 그들의 환심을 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진의 추장들은 경계를 풀고 마음껏 마시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두 술에 취하자 윤관은 명령을 내려 단숨에 이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또한, 관문까지 왔다가 의심을 하고 들어오지 않은 여진족 5, 60명은 김부필과 척준경을 시켜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최홍정에게 기습 공격하게 하여 대부분 사로잡거나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척경입비도 윤관의 여진 정벌척경입비도 윤관의 여진 정벌


윤관은 멈추지 않고 그 여세를 몰아 대공세에 나섰다. 그는 직접 5만 3천 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으로 나가는 한편, 중군병마사 김한충에게 3만 6,700명을 주어 안륙수로, 좌군병마사 문관에게 3만 3,900명을 주어 정주 흥화문으로, 우군병마사 김덕에게 4만 3,800명을 주어 선덕진 안해로, 양유송과 정숭용 등에게 선병 2,600명을 주어 도린포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자 추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고려군은 곧 여진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석성에 들어간 여진족들이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돌과 화살을 퍼부으며 강력하게 대응해 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윤관은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날이 저물게 되면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윤관은 병마녹사척준경을 불러 "날은 저물고 사태는 급박하니, 너는 장군 이판진과 함께 반드시 성을 공략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척준경은 "오늘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성을 파하여 공의 은혜에 보답할 때입니다"라며 힘을 다하여 싸울 것을 다짐했다.


척준경은 훗날 이자겸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 되지만, 이때에는 윤관에게 있어 둘도 없이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지난날 척준경이 임간과 함께 여진 정벌에 나섰을 때 퇴로를 열어 임간을 구출했으나, 패전한 죄로 탄핵을 받아 임간과 함께 파직된 적이 있었다. 이때 윤관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오히려 그를 천우위록사 참군사로 승진시켜 주었다. 척준경이 윤관에게 목숨을 걸고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고려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고려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


척준경이 즉시 적진으로 들어가 여진 추장 서너 명을 격살하자, 윤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하여 여진을 격파하고 석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최홍정과 김부필 등이 이위동에서 적군 1,200명의 목을 베고, 중군은 고사한 등 35촌을 빼앗고 적군 380명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좌군은 심곤 등 31촌을 빼앗고 적군 950명의 목을 베었다. 윤관은 대내파지(함주)에서 37촌을 빼앗고 적군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윤관은 병마녹사 유영약을 보내 예종에게 승전보를 알리고, 장수들을 보내 점령지마다 성을 쌓기 시작했다. 또한, 영주성 안에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 개의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은 숙종의 염원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