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주요 인물 2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4. 11:01

출처 - 재미로 읽는 일본역사의 비밀, 이우각, 한림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1568-1622)

구로다 나가마사는 지금의 오오이다겐에 있는 나가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 구로다 요시다가의 아들이다.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1568-1622)구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1568-1622)

(출처 : 万历援朝战争始末(二十七))


임진왜란 때는 1만 2천 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평양성에 입성했다. 그 후 황해도에 주둔했는데, 곧 이정암이 지휘하는 의병에게 패전하여 서울로 퇴각했다. 다시 서울에서 퇴각하여 양산시 기장면 해안가에 견고한 왜성을 축성한 후 머물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북상하다 충청도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을 만나자 싸우지 않고 퇴각하여 기장 왜성에 들어갔다. 구로다 가문의 문서보관소인 슈게쓰교도관에 보관된 "코 영수증"을 살펴보면, 구로다는 전라도에는 가지 않았고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597년 8월 16일부터 약 한 달간 코베기를 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なべしま なおしげ, 1538-1618)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사가겐 사가성의 성주였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なべしま なおしげ, 1538-1618)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なべしま なおしげ, 1538-1618)

(출처 : 信长之野望》DLC第三弹 石田三成等10人登场)


임진왜란 때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를 받으며 함경도로 진격했다. 이때 정문부가 지휘하는 의병에게 밀려 퇴각,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의 낙동강변에 죽림 왜성을 축성했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북진 중에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출현에 놀라 남으로 후퇴, 용안 회의에서 금구, 김제에 배치되었다. 금구에서 조선 의병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용안 회의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정읍회의에서 다시 전라남도에 재배치할 때 나베시마 부대는 화순, 능주에 배치되었다. 이후 경상도로 후퇴하여 지금의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산호공원 자리에 마산 왜성을 축성했다.


금구 전투에서의 코 영수증을 보면, 전투는 8월 14일에 있었는데 영수증을 받은 날짜는 10월 1일로 되어 있다. 충청도에서 얻은 코를 전라도에서 얻은 것처럼 문서를 만들었던 셈이다.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 아리다, 이마리 등에 세계적인 도자기 명산지를 만들었다.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広家, きっかわ ひろいえ, 1561-1625)

깃카와 히로이에는 도미다죠오의 성주였다.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広家, きっかわ ひろいえ, 1561-1625)깃카와 히로이에 (吉川広家, きっかわ ひろいえ, 1561-1625)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모디 모도나리의 손자이고, 모리 데루모도와는 4촌 간이다. 아버지 모리 모도하루가 깃카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는 부하 5천 명을 이끌고 모리 데루모도 밑에서 경상도에 주둔했다. 그 후 행주산성 싸움에서 다쳤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용안 회의 영광에 배치되었는데 가지 않다가, 정읍회의에서 진원에 재배치받았다.


소 요시토시 (宗義智, そう よしとし, 1568-1615)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의 영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조선말을 잘했다.


소 요시토시 (宗義智, そう よしとし, 1568-1615)소 요시토시 (宗義智, そう よしとし, 1568-1615)

(출처 : 揭秘:万历时期明朝军队援朝初战平壤受挫真相)


대마도는 농토가 적은 데다 박토여서 주민들은 왜구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대를 약탈했다.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조선은 소 요시토시에게 녹봉을 주고 모역독점권을 주어 왜구의 약탈을 단속하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에게 "조선왕이 일본으로 건너와 영토를 바치고 항복하게 주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일 반대하면 죽게 될 것이 뻔하므로 "조선왕이 병이 들어 못 온다"는 등 여러 가지 구실로 시간을 끌다가, 조선 조정의 중신들에게 히데요시의 속셈을 전했다.

그는 선조 임금을 알현하고 공작 한 쌍, 조총 여러 자루, 말 한 필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를 히데요시에게 접견시켜 전쟁 방지에 나름대로 노력했다.


임진, 정유재란 때는 장인 고니시와 행동을 같이했다. 전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대권을 쥐자 도쿠가와의 비위를 맞추려고 고니시(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참수당함)의 딸인 부인과 이혼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 たかかげ, 1533-1597)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의 셋째 아들인데, 고바야가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깃카와가의 양자가 된 형 모도하루와 함께 모리 가문을 잘 보전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을 "모리 료오센"으로 불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 たかかげ, 1533-1597)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 たかかげ, 1533-1597)

(출처 : 小早川隆景)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중에서 말썽을 많이 피우던 히데아기를 자기의 양자로 맡아 길러 히데요시의 신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 때는 1만 2천 7백 명을 지휘하여 서울에 입성한 후 전라도에 진격했다. 1592년 7월 8일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이치에서 전라절제사 권율,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 5백여 명의 조선군 반격을 받고 패전했다. 2차에 걸친 금산 전투에서는 전라도민의 반격이 너무 거세자 전라도 점령을 단념했다.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패전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명예 회복을 위해 벽제에 잠복, 방심하고 있던 명군을 기습 공격했다. 원래부터 전투할 뜻이 없었던 명군은 평양까지 퇴각하며 전혀 싸우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바야가와는 일본 역사에서 일약 명장이 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 (安国寺 恵瓊, あんこくじ えけい, 1539-1600)

안코쿠지 에케이는 승려였는데, 학식이 있고 언변이 좋아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어 영주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사를 이끌고 진안을 거쳐 전주에 입성하려다 웅치에서 조선 의병들의 격렬한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안코쿠지 에케이 (安国寺 恵瓊, あんこくじ えけい, 1539-1600)안코쿠지 에케이 (安国寺 恵瓊, あんこくじ えけい, 1539-1600)

(출처 : duitang.com)


조선에 일본어를 보급하려 힘썼다. 조선의 문화재를 많이 약탈했다.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패전하여 참수되자, 그가 약탈해 간 조선의 문화재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요시라 (要時羅/要矢羅, -1598)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중에 조선말을 잘하는 가게하시 히지다이후, 요지로오, 요시라로 불리는 이중간첩이 있었다. 정유재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가 농간을 부려, 요시라가 경상우도병사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거짓 상륙 예정일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조선 조정을 속여 이순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나고 북경으로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시바 히데카츠 (豊臣秀勝, とよとみ ひでかつ, 1569-1592)

하시바 히데카츠는 기후죠오의 성주였다. 히데요시 누이의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 간빠구 히데쓰구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는 제9군의 지휘자로 출병하여 거제도에서 병사했다.


하시바 히데카츠 (豊臣秀勝, とよとみ ひでかつ, 1569-1592)하시바 히데카츠 (豊臣秀勝, とよとみ ひでかつ, 1569-1592)

(출처 : 淀殿和丰臣秀赖的画像)


와기사가 야스하루 (脇坂 安治, わきざか やすはる, 1554-1626)

와기사가 야스하루는 오오미 출신이다. 처음에는 아게지 미쓰히데의 부하였는데, 나중에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1583년 시바다 가쓰이에와의 시스가다게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와기사가 야스하루 (脇坂 安治, わきざか やすはる, 1554-1626)와기사가 야스하루 (脇坂 安治, わきざか やすはる, 1554-1626)

(출처 : 胁坂安治简介 胁坂安治评价如何)


아와지시마 스모도죠오의 성주가 되어 임진왜란에 참가했다. 전선 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싸웠으나 조선 수군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살아남아 육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세기가하라 싸움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에 가담해 참전했는데, 미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 고보야가와 히데아기와 함께 배반하여 전투 중에 돌연 아군을 공격, 서군을 패전하게 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와기사가가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다"고 나와 있고, 한산도 해전에서 패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来島通総, くるしま みちふさ, 1561-1597)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이오죠오의 성주였다. 일본군 수군 대장으로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에서 패전하여 달아났다.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来島通総, くるしま みちふさ, 1561-1597)구루시마 미치후사 (来島通総, くるしま みちふさ, 1561-1597)

(출처 : 来岛通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