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주요 인물 1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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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미로 읽는 일본역사의 비밀, 이우각, 한림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아이지겐 나카무라에서 태어났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

(출처 : 人人小站~浮世绘ㄨ日本战国)


그는 히데요시 어머니의 4촌 여동생 아들이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많이 세우고 구마모도의 구마모도죠오 성주가 되었다.


인접해있는 우도성의 성주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가 나빴다. 히데요시 사후 세기가하라의 싸움에서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승리했다. 도쿠가와 측에 반대하다 참수당한 고니시의 영토 우도를 빼앗아 구마모도의 영주가 된 뒤 현재의 구마모도죠오를 축성했다. 현재는 신격화되어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도구도미 소호오는 "가토 기요마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정도의 신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시마쓰 요시히로 (島津義弘, しまづ よしひろ, 1535-1619)

시마쓰 요시히로는 오오스미 구리노죠오의 성주였다. 임진왜란 초기 한반도에 출병하기 위해 일본군이 나고야에 집결하고 있을 때, 오오스미의 호족 우메기다 구니가네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마쓰 요시히로 (島津義弘, しまづ よしひろ, 1535-1619)시마쓰 요시히로 (島津義弘, しまづ よしひろ, 1535-1619)

(출처 : 战国BASARA4 全人物图文介绍)


시마쓰 부대가 출병한 후 후방을 맡은 시마쓰 요시히로의 동생 시마쓰 도시히사를 히데요시가 할복자살 시켰다. 요시히로는 1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강원도 점령을 맡았다. 한데 한반도 파견군의 반란을 걱정한 히데요시는 이런 지시를 했다.


"수송선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라"


요시히로는 많은 조선 사람들을 납치해 귀환 선편에 보냈다. 정유재란 때는 선봉 부대 다음으로 1597년 5월 1일에 가덕도에 상륙, 3개월간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행동을 개시하여 7월 28일 견내량을 지나 남원성 전투에 참여, 이 전투에서 얻은 코 61개를 인도해 할당량을 완납했다. 용안 회의에서 전라북도 부안에 배치되었지만, 금구의 조선 의병이 공격하자 "전라북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 정읍회의에서는 더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전라남도 해남, 강진으로 배치받았다. 약 15일간 머물다가 조선 의병에 밀려 경남 사천으로 후퇴, 신진리 왜성을 축성하고 주둔했다.


"조선 사람은 일본군을 믿고 농사에 전념하라. 조선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본군은 신고하면 처벌하겠다."


이런 방을 써 붙이는 선무공작의 경상도 책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사실을 알고 명군과 싸우지 않고 있다가, 본국에서 온 자기 부대의 수송선을 타고 남해안 남단을 지나 일본 본토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와 북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귀환했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いしだ みつなり, 1560-1600)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이었을 때 나가하마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한 절에서 심부름을 하는 어린 이시다가 차를 마음에 들게 끓여 줘서 데려다 키웠다. 장성하여 문관으로 임용되어 히데요시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いしだ みつなり, 1560-1600)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いしだ みつなり, 1560-1600)

(출처 : 石田三成)


임진왜란 때 군감으로 조선에 왔는데, "승리할 희망이 없다"고 판단, 히데요시에게 전선의 실정을 알리고 후퇴를 상신, 이를 허락받고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1600년 세기가하라 싸움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여 서군을 총지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과 싸웠다. 전투 도중 히데아기가 모반하여 서군이 패배했다. 동군에 붙잡혀 사가이와 경도 시내를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한 바퀴 돌림을 당한 후 참수당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とよとみ ひでなが, 1540-1590)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아버지가 다른 히데요시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히데요시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とよとみ ひでなが, 1540-1590)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とよとみ ひでなが, 1540-1590)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


1591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살아있었다면 전쟁을 반대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1561-1624)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아리 출신이다. 어려서 히데요시 아래서 자랐고, 시바다가쓰이에와의 싸움에서 선봉으로 전공을 세웠다.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기, 와기사가 야스하루, 가다기리 가쓰모도, 히라노 나가야스, 가스야 다데노리와 함께 시스가다께노 히지혼야리라고 불린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1561-1624)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1561-1624)

(출처 : 《戰國無雙4》近畿之章幾位既有武將公開)


임진왜란 때는 충청도 점령을 맡았다. 히데요시 아래서 함께 자란 이시다 미츠나리 같은 문치파와 달리,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무단파에 속해 서로 대립했다. 1600년 세기가하라 싸움에도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에 가담했다. 덕분에 종전 후 히로시마죠오의 성주가 되었는데, 허락 없이 성을 신축하여 감봉되고 시나노로 좌천되었다.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うきた ひでいえ, 1573-1655)

우키타 히데이에는 오가야마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버지가 8세 때 죽어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측근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과 결혼했다.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うきた ひでいえ, 1573-1655)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うきた ひでいえ, 1573-1655)

(출처 : 宇喜多秀家)


임진왜란 때는 19세의 나이로 일본군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에 머물면서 전 일본군을 지휘했다. 정유재란 때는 좌군의 총지휘자가 되어 남원성을 공략하여 8월 15일에 함락시키고, 일본군 부대장들을 전주에 모아 회의를 주재한 후 일제히 충청로 북상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량 부족을 이유로 다시 전라도로 후퇴했다. 1597년 9월 11일 용안에서 부대장들을 모아 전라북도 각 군에 배치했다.


9월 13일 금구에 배치된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대가 조선 의병의 결사적인 공격을 받자, "전라북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 용안 회의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9월 16일 정읍에서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이를 통해 더욱 안전한 전라남도로 부대를 재배치했다. 우키타 부대는 장흥, 보성을 주둔지로 정했지만 일본 수군이 명량해협에서 대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0일 정도만 전라남도에 머물다 경상도 해안가로 다시 이동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여러 영주가 두 파로 양분되어 천하 대권을 놓고 싸운 1600년의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 동경 남쪽 하지조지마에 유배되어 83세로 생애를 마쳤다. 우키타 가문은 단절되어 그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임진, 정유재란에 걸쳐 조선의 문화재를 가장 많이 약탈했다. 현재 그 문화재가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다.


조오소가베 모도지가 (長宗我部元親, 1539-1599)

조오소가베 모도지가는 고오지죠오의 성주였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의 시고구를 평정했다.


조오소가베 모도지가 (長宗我部元親, 1539-1599)조오소가베 모도지가 (長宗我部元親, 1539-1599)

(출처 : 没事儿发些图,都是原汁原味的,欢迎补充啊)


오다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자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신하가 되어 도사의 영주가 되었다. 그 외의 영토는 몰수당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충청도에 있다가 남으로 후퇴, 장문포 왜성을 수축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정유재란 때는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고, 정읍회의에서 나주에 배치되었다. 나주에서 코 6,006개를 베어 6개의 나무통에 넣어 가져갔다.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もうり てるもと, 1553-1625)

모리 데루모토는 히로마죠오의 성주였다. 전국 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의 손자다.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もうり てるもと, 1553-1625)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もうり てるもと, 1553-1625)

(출처 : 日本战国武将历史画像五十图)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항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었다. 모리측의 다가마쓰죠오가 강변의 저지대에 있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이 강에 둑을 만들어 물을 막자, 그 성이 물 위에 뜬 섬 같이 되고 말았다. 승부가 나지 않고 장기화하자, 경도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부장 아게지 미쓰히데의 부대를 히데요시 지원병으로 파견했다. 한데 아게지 미쓰히데가 돌연 회군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했다. 아게지가 비밀리에 모리 데루모토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밀사를 보냈는데, 그 밀사가 길을 잘못 들어 히데요시의 부대로 들어가 잡혔다. 히데요시는 오다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모리 데루모토와 화해했다. 그런 후 아게지 부대와 야마사기에서 싸워 승리했다. 그후 히데요시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자 데루모토는 자연히 그의 부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3만 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제7군의 장수로서 경상도 점령을 맡아 개녕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부산 왜성과 자성대를 축성했다.


정유재란 때 히데요시의 코베기 명령이 있자, 모리 데루모토는 우키타 히데이에와 "가엾은 일이다, 차마 어떻게 손을 대겠는가!"하고 가엾어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가엾으니, 모두 코만 베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1597년 8월 15일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고, 9월 16일 정읍회의에서 진원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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