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동진 조적과 유곤, 관중에서 꺼진 서진의 마지막 불꽃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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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곤劉琨은 조적을 가리켜, 명쾌하게 이치를 터득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말했다.


"그는 젊었을 때, 왕돈王敦을 감탄케 한 사람이야." (1)


동진 유곤과 조적동진 유곤과 조적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유효표의 주.

 

(1) 우예虞預 진서晉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적의 자는 사치士稚이며 범양范陽 주遒 땅 사람이다. 방일하고 활달하여 예의범절 따위를 익히지 않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 한편 베풀기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의 조적과 유곤 일러스트어린 시절의 조적과 유곤 일러스트

(출처 ; 闻鸡起舞)


진양추晉陽秋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적은 사공司空 유곤과 함께 호걸로서 세상에 이름이 자자했다. 24세 때 유곤과 같이 사주주부司州主簿로 부름을 받았다. 서로 정이 두터워 함게 이불을 덮고 잔 일도 있었는데 한밤 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모두 일어나서 말했다.


"이는 나쁜 소리만은 아니오."


두 사람은 항상 세상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 밤중에 일어나서,


"만약 천하가 문란해지고 호걸들이 사방에서 일어난다면 그대와 나는 중원에서 서로 침범을 피하며 공을 세우세."


라고 말했다. 여남태수가 되었는데 경사京師(서진의 수도 낙양)가 함락되자 난민 수백 호를 이끌고 남쪽으로 건너가 사구泗口에 이르렀다. 안동장군(당시 안동장군이던 동진 원제 사마예)이 불러 서주자사에 임명했다.


유총에게 끌려간 진회제 사마치유총에게 끌려간 진회제 사마치

(출처 : 西晋的最后两任皇帝 都是受尽屈辱后悲惨死去)


조적은 원래 웅재가 있었으며 언제나 비분강개하며 중원의 회복은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종中宗(동진 원제 사마예)에게 중원 탈환의 계책을 진언했다. (중종은) 그를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스스로 군사를 모으게 하였다. 조적은 부곡部曲 백여가百餘家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 북쪽으로 갔는데 맹세하여 말했다.


"나 조적이 만약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이곳을 건너는 일이 있다면 천벌이 내리기를, 이 대강大江이 흐르는 것처럼 분명하리라."


마을을 공격하고 성을 함락시키며 의용군을 휘하에 모으고 차례로 석호의 군단을 격파했다.


한나라, 서진 간의 낙양 포위전한나라, 서진 간의 낙양 포위전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석호는 마침내 두번 다시 하남을 엿보려고 하지 않았다. 석륵은 조적의 어머니 묘지를 지키는 묘지기를 두었다. 유곤은 친한 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는 창을 베게 삼아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역적을 쳐부술 생각인데 언제나 조적이 나보다 먼저 공을 세우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주 걱정을 하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요성이 예주의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조적은 말했다.


"이것은 분명 나 때문이오. 하늘은 아직 외적을 멸절코자 하지 않음이오."


후에 거기장군車騎將軍이 추증되었다.'


세설신어 中, 상예賞譽(인물의 품격과 재능의 훌륭함에 대한 감상과 칭송)편 43화

세설신어 中, 안길환, 명문당, 284p~286p


서진 말기 유요가 한漢나라를 세우며 중화의 중심은 강남으로 옮겨갑니다. 당시로선 유곤이야 말로 중원에 마지막 남은 한족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선비족인 단필제와 좋은 관계를 갖게 되며 세력을 일시적으로 융성하게 만들었으나 이내 힘이 모자라 세력을 잃고 본인도 목숨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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