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유의경의 세설신어 해제解題 - 2, 안길환, 명문당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30. 17:30
반응형

세설신어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후한말부터 위진에 걸친 동안, 그 시대 사람들의 언행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배경이 되는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후한 왕조가 붕괴의 조짐을 보였을 때 환관의 전횡에 반항하여 일어난 기개의 선비들은 자신들을 청류淸流로 보고 크게 정치 언론을 폈다. 이것을 청의淸議라고 한다. 조조가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그는 강력하게 언론을 압박했고, 명제에 이르러서는 특히 강하게 언론 탄압을 하였다. 이때 정치적 권력을 백안시하고, 권력자들이 방패로 삼는 유교적 예교를 도외시하면서 자유정신을 찾던 귀족들은 오히려 정치에서 떠나 철학적 담론에 탐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청담淸談이었다.


은둔에 빠진 후한 청류파은둔에 빠진 후한 청류파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청담은 이렇게 해서 문제의 황초 연간, 그리고 이어서 명제의 태화, 청룡 연간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정시 시대의 하안, 왕필 등에 이르러서 성황기를 이루었다. 하안何晏, 왕필王弼은 함께 노자老子에 주를 달았고, 또 하안은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왕필은 역경주場經를 쓴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하안은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조상의 일파였으므로, 조상이 사마의에게 멸망하자 하안도 주멸당했다. 사마의의 아들은 사마사가 대장군이 되어, 제왕 방을 폐하고 고귀향공 모를 세우고, 이어서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가 실권을 잡더니, 사마소가 사거한 다음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의 무제로 즉위한다.


이 사이에 정국의 암흑은 실로 뒤숭숭했으며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위진 교체 시기에 나온 것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죽림 속에 칠현이 모였었다는 이야기는 그 후 동진 시대가 된 다음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겠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허위적인 예교禮敎(예의에 관한 가르침, 당대엔 허례허식이 만연했음)에 반대하고, 참되고 자유스런 생활태도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죽림칠현 상상도죽림칠현 상상도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위나라가 멸망하고 사마씨의 진왕조가 시작되자, 이 시대에 두드러졌던 일은 무제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현저한 사치 풍조였다. 이미 중앙 집권의 실력이 약해졌고, 귀족들의 긍지가 그만큼 강해졌었던 것이리라. 석숭, 왕개 등, 귀족의 사치는 세설신어에도 묘사된 그대로이며 후세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윽고 혜제 때가 되자 '팔왕의 난'이 일어나고, 그것이 7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바람에 나라는 전혀 다스려지지 않았고, 그 사이에 북방 이적부족이 득세하여 남하해 왔다. 이른바 '영가의 난'이다 '영가의 난'에 의해 중국 북방은 이적들에게 점령당하고, 중국의 귀족과 호족은 모두 강남으로 이동했으며, 일반 국민도 역시 앞다투어 강을 건넜다. 그리고 건강을 도읍으로 하는 동진 왕조가 성립된다. 이때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실행되었으므로 그 이후 강남에 중국문화의 꽃이 피는 시대가 되었다.


낭야 왕씨를 대표하는 왕휘지낭야 왕씨를 대표하는 왕휘지

(출처 :【琅琊王氏:王徽之】)


동진 왕조의 건설에 가장 많이 공헌한 것은 낭야왕씨琅邪王氏의 일족인 왕도였다. 왕도王導는 원제, 명제, 성제 등 3대에 걸쳐 동진 왕조의 정치를 지도한 대공로자였다. 이 강남 정권의 주력이 되었던 것은 북방에서 강을 건너온 귀족들이었는데, 왕도는 그들을 잘 다루어 동진 왕조를 그 위에 굳건히 세웠다. 왕도는 세설신어에서 선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이며, 그가 그의 종형인 왕돈王敦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 대하여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그 점에 관한 이야기도 세설신어에 보인다. 


진군 사씨의 종묘 사진진군 사씨의 종묘 사진

(출처 : 陈郡谢氏宗祠)


다행스럽게도 왕돈의 모반은 실패로 끝이 났는데 왕도도, 그리고 왕도와 함께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유량庾亮도 세상을 떠나고, 유량의 동생인 유빙庾氷이 재상으로 있을 무렵에는 이미 동진의 원훈인 온교溫嶠, 치감郗鑒, 도간陶侃 등도 세상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환온桓溫이 조정에 대하여 딴 뜻을 품는다.


환온은 북방 공략에 큰 공이 있었으며 그 세력은 점차 두드러지게 커갔다. 이 무렵 사안謝安이 재상이 되어 동진 왕조를 잘 지켜내고 있었다. 사안은 낭야의 왕씨와 병칭되는 진군사씨陳郡謝氏의 일족이었다. 환온의 야심을 억제하기 위하여 은호殷浩를 기용했는데 은호는 북벌에 실패하고 도리어 환온에게 탄핵을 받아 서인이 되어 귀양지에 있으면서 '돌돌괴사咄咄怪事(답답하고 괴롭다)'란 네 글자를 하늘에 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세설신어에 나온다.


환온에게 편지를 잘못 쓴 은호환온에게 편지를 잘못 쓴 은호

(출처 : 殷浩两次北伐失败后被贬 成语“咄咄怪事”与他有关)


환온은 왕위를 꿈꾸면서 효무제 영강 원년에 죽어갔는데 그 아들 환현이 안제 원흥 2년, 마침내 건강으로 쳐들어가 스스로 제라 칭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 유유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유유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송나라 무제이다.


출처 - 세설신어 下, 안길환, 명문당, 577p~580p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