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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경의 세설신어 해제解題 - 1, 안길환, 명문당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29. 18:30

1.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세설世說 8권, 송임천왕의경찬宋臨川王羲慶撰. 세설 10권, 양유효표주梁劉孝標注'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은 처음에는 그냥 세설이라고 불리었다.


남송 왕조汪藻의 세설서록世說敍錄에 의하면 이미 양梁, 진陳 무렵까지는 세설신서世說新錄로 제목을 바꾼 것이 있으며, 당唐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도 세설신서의 이야기가 보인다.


세설신어 첫 장, 임천왕 유의경이 짓고 유효표가 주를 달았다는 부분이 보인다세설신어 첫 장, 임천왕 유의경이 짓고 유효표가 주를 달았다는 부분이 보인다

(출처, 바이두 백과)


왜 신서란 글자를 보충했는지에 대하여 사고전서 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황백사의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인용하여, 한나라 유향에게도 세설이란 책이 있었는데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그 때문에 유의경이 모은 것을 세설신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 17, 잡설雜設 제진사諸晉史 7조에 유의경의 세설신어란 책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 들어와서는 세설신어로 불리었으며, 그것이 송대 이후가 되면 한결같이 세설신어로 불리게 되었다.


세설신어의 저자 유의경세설신어의 저자 유의경

(출처 : 世说新语)


이 책은 위로는 후한으로부터 아래로는 동진에 이르기까지의 일사쇄어(무슨 뜻인지 모르겠음)를 모은 것이며, 유효표의 주는 그 이야깃거리들에 대하여 여러 다른 사서에서 보이는 것을 참고로 하여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세설신어의 그 재미있고 긴장감에 넘치며 세련된 문장은 아무래도 집필한 사람(유의경)이 픽션을 사용하고 촌언쌍어寸言雙語(짤막하나 짤막하지 않고, 간단하나 간단하지 않은 두 가지 의미의 글)에 각 인물들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코자 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사서가 아니라 문학이다. 그러므로 수지隋志에서도 소설로 취급하고 있으며, 사고전서 총목제요總目提要에서도 자부子部 소설가류小說家類에 넣고있다. 또 노신 역시 소설사략 속에 이 책을 포함하고 있다.


유의경의 전은 송서宋:51 종실전宗室傳 및 남사 유의경전劉義慶傳에 보이는데 그는 육조 말기의 고조高祖 유유劉裕의 조카로서 장사왕 유도련의 차남으로, 동진 안제 원흥 2년(403)에 태어났고, 임천왕 유도규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양자로 들어갔다. 13세 때 남군공을 습봉하고, 영초 원년(420) 임천왕의 습봉을 받았다.


유의경의 다른 초상유의경의 다른 초상

(출처 : 俺老汉自言自语(1193)古今肖兔名人南朝宋政权文学家刘义庆)


원가 연간에 산기상시, 비서감, 탁지상서를 거쳐 단양윤, 보국장군이 되었다. 이어서 원가 6년에는 상서좌복야, 9년에는 형주, 옹주, 익주, 영주, 양주, 남북진 등 7주의 제군을 도독하고 평서장군, 형주자사가 되었다. 이어서 16년에는 위장군, 강주자사, 17년에는 남연주자사가 되었고, 이어서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다. 그리고 21년(444) 경사에서 사거했다. 향년 42세, 시중사공이 추증되었다.


위인이 간소과욕하며 문학을 사랑했고, 종실 중에서도 특별히 존경을 받았는데 단, 만년에 사문을 봉양하며 과다한 재물을 허비했던 일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즐겨 문한의 선비들을 불러왔는데 원근을 가리지 아니했다. 강주자사였을 때(38세)는 당시 문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원숙袁淑을 초빙하여 자의참군으로 삼았고, 그밖에 육전陸展, 하장유何長瑜, 포조鮑照 등 문인을 막중에 두었다. 세설신어의 찬에 있어, 이들의 힘을 입었던 바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유의경의 찬으로 된 책에 선험기 30권, 유명록 20권, 소설 10권, 서주선현전 10권 및 문집 8권이 있다. 특히 소설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음이 이것에 의해서도 알 수가 있다.


왕의지. 세설신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이도 책 읽기를 즐겼다왕의지. 세설신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이도 책 읽기를 즐겼다

(출처 : 熙子景曾画书圣)


유의경의 세설신어에 주를 단 사람으로는 제양齊梁(제나라와 양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다는 의미) 간의 사람 경윤敬胤이 있으며, 또 세설신어 문학편 속에 '일본주一本注'로 인용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일실되어 전하지 않고 오지 유효표의 주만이 전한다.


주가 전한다기보다 이 주에 의하여 세설신어는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유의경의 본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 징인懲引(인용한 책과 범위)이 극히 넓어서 세설신어 본문과 함께 읽어야 하는데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함께 세상에서 칭송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판매 중인 세설신어 표지중국에서 판매 중인 세설신어 표지

(출처 : 世说新语》 骆玉明)


유효표劉孝標의 전은 양서 50에 보인다.


유준劉峻, 자는 효표孝標, 평원 사람이다. 아버지 유반은 송나라 시흥내사였다. 송나라 무제 대명 6년(462)에 태어나 양나라 무제 보통 2년(521)에 60세로 사거해다. 태시 연간에 고향이 북위에게 점령당했는데 8세대 사람에게 붙잡히어 중산의 부호인 유실에게 팔려갔는데, 유실은 그의 영민함을 보고, 학문을 시켰다.


그는 밤새 잠을 자지 않으면서 독서를 했다. 제나라 영명 연간에 도읍으로 나와서 다시 이서異書(그리 흔하지 아니한 진기한 책)를 구하여 독서에 탐닉했는데 남들은 그를 가리켜 독음讀淫(읽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불우한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안성왕의 부름을 받고 호조참군이 되어, 왕을 위해 유원類苑을 찬했으나 아직 완성되기 전에 병을 얻어 떠났다. 그는 동양의 자암산에 집을 의지해놓고 살면서 산서지山栖志를 썼다. 양나라 무제가 문학하는 선비들을 불러 모았을 대 그의 솔직한 성격이 화가 되었음인지, 채용되지 못했다. 그는 변명론辨命論을 지어 그 감회를 읊었다.


세설신어 해서본세설신어 해서본

(출처 : 바이두 이미지)


동양에 있을 때 수많은 지방 사람들이 그에게 배웠는데 그가 죽자 문인들은 그에게 현정선생玄靖先生이라는 시호를 바쳤다. 문집 6권이 있다. 그의 세설신어 주가 실로 상세하고 해박한 것은 역시 이상과 같은 그의 사람 됨됨이에서 온 것이리라.


출처, 세설신어 下, 안길환, 명문당, 574p~5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