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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을 받고 목숨을 잃은 하후현 [사마소 형제와 종회 형제의 원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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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현夏侯玄이 붙잡혔을 때, (1) 종육鍾毓은 정위廷尉였다. 종회鍾會(종육의 동생)는 그때까지 하후현과 면식이 없었으므로 함부로 행동을 취했다. 하후현이 말했다.


"비록 죄수의 몸이라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


고문을 당했지만, 처음부터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동시東市에서 처형당할 때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3)


삼국지 속 종회삼국지 속 종회


유효표의 주.


(1)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후현이 자는 태초太初이고 초국譙國 사람이다. 하후상의 아들이며 대장군(사마사)의 전처 오빠이다. 사람 됨됨이는 고명했으며 언변이 뛰어났고 박학했다. 정시 연간에 호군이 되었다. 조상이 주살 당한 후에 태상으로 초청되었다. 마음속으로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으며 기록물도 남겨놓지 아니했다.


태부(사마의)가 죽고 나자 허윤이 하후현에게 말했다. "그대는 더는 근심할 게 없게 되었소." 하후현은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세상일을 보지 못하시오? 그분(사마의)은 그래도 나를 가까운 집안의 사람으로 대우해주었지만 자원(사마사)과 자상(사마소)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외다."


나중에 중서령 이풍이 대장군의 집정을 싫어하여 하후현으로 그를 대신케 하려고 도모했다. 대장군은 그런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풍을 죽이고 하후현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인도했다.'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풍이 계책을 세울 때, 하후현에게 그 의도를 일러 달라고 했다. 하후현이 대답했다. "마땅히 자세한 사정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이풍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하후현 일러스트하후현 일러스트


(2) 세어世語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후현은 정위의 관소官所에 인도되었는데 결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정위 종육이 스스로 하후현을 조사코자 하였다. 하후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에게 무엇을 자백하라는 게요? 영사令史 대신 나를 다그치려는 게요? 그러면 당신이 나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시구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인 데다가 절조가 높은 터라, 굴복시킬 수가 없으나, 옥사獄事는 어떻게든 끝내야 했으므로, 밤이 되자 사실과 부합되도록 진술서를 꾸미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내밀었다.


사마사, 사마소 형제사마사, 사마소 형제


하후현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종회는 하후현보다 연하年下였고 하후현과는 친교가 없었다. 이날 종육의 옆에 있으면서 버릇없이 굴었다. 하후현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종군鍾君, 어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명사전名士傳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하후현은 종육의 뜻이 자기와 같지 않으므로 사귀지 아니했었다. 하후현이 체포되었을 때 종육(종회?)은 정위였는데 하후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태초太初(하후현의 자字)여,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고?" 하후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죄수의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새삼스럽게 교분을 맺을 수는 없어!"


생각하건데(유효표의 말) 곽반은 서진 사람으로서 시대가 가깝고, 그의 진위세어晉魏世語는 내용이 상세하다. 손성의 위씨춘추 등은 모두 이것에 따르고 있는데, 하나같이 하후현이 종회를 거부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쓰인 원굉의 명사전은 전사前史에 따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종육이었다고 적은 것은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후휘. 하후현의 동생 사마사의 아내하후휘. 하후현의 동생 사마사의 아내

(출처 : 我心里的夏侯徽,吴夫人和羊徽瑜)


(3) 위지魏志에 이런 말이 있다. '하후현은 뛰어난 기량과 경세의 뜻을 지녔었는데 처형당할 때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며 그 태도는 실로 침착했다.'


세설신어 中, 방정(현사들의 바르고 모범이 되는 언행)편 6화

세설신어 中, 안길환, 명문당, 20p~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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