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내 시중을 돌려주시오" - 동진 성제 사마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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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成帝(동진 사마연)가 석두石頭에 있을 때, 임양任讓이 성제의 눈앞에서 시중侍中인 종아鍾雅(2)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유초劉超(3)를 체포했다. 성제는 울면서 말했다. (322년생 말띠인 사마연은 329년 당시 8세)


"내 시중을 돌려주시오."


임양은 황제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유초와 종아의 목을 베고 말았다.(4) 반란이 평정된 다음 도공陶公(도간, 陶侃)은 임양과 구교舊交가 있었던 고로 그를 용서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마연을 위해 계책을 내다가 죽임을 당한 종아사마연을 위해 계책을 내다가 죽임을 당한 종아


한편 허류許柳의 아들인 사비思妣란 사람은 훌륭한 인물로서 제공諸公들은 모두 그의 목숨을 구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사비를 살려준다면 도공을 위해 임양을 살려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을 모두 용서해 주기로 하고 이 사실을 성제에게 상주上奏했다. 황제는 말했다.


"임양은 내 시중을 죽인 자요. 용서해 줄 수 없소이다."


제공들은 어린 군주에게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두 사람 모두 참형에 처했다.


유효표의 주.


(2) 진양추晉陽秋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임양은 낙안樂安 사람으로서 임씨 가문의 자손이었다. 소준蘇峻의 난亂을 일으켰다.'

종아별전鍾雅別傳에는 이런 말이 있다. '종아의 자는 언주彦胄이며 영천潁川 장사長社 사람이다. 위魏나라 태부太傅 종요鍾繇의 동생이며, 중상仲常의 증손이다. 젊었을 때부터 재능이 있었고 큰 뜻을 품었으며 누천되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동진 성제 사마연동진 성제 사마연


(3) 진양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초의 자는 세유世踰이고 낭야瑯琊 사람이며 한漢나라 성양경왕城陽景王의 6대손이다. 임기자향후臨沂慈鄕候에 봉해졌고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 유미劉微는 낭야국 상장군이었다. 유초는 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는데 이윽고 기실연記室撚, 안동사인安東舍人으로 옮겼다.


충직하고 청렴하며 신중했기 때문에 중종中宗(동진 건국자 사마예)에게 발탁되었다. 벼슬이 중서中書였으므로 사람들과 왕래를 끊고 편지를 나누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빈객이 들어오지 못 하게 했는데 집안에는 약간의 저축도 없었다. 왕돈의 토벌에 공이 있었으므로 영양백零陽伯에 봉해졌고 의흥태수義興太守가 되었는데 배명拜命을 위해 조정에 갔다가 돌아와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신중하고 과묵하기가 이와 같았다.'


사마연의 어머니 유황후. 유문군사마연의 어머니 유황후. 유문군


(4) 종아별전鍾雅別傳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소준은 황제를 협박하여 석두에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이동)토록 하였다. 종아와 유초는 둘이서 황제 곁에 있으면서 황제를 지키고 있었다. 석두에 있는 자들과 은밀히 황제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일이 발각되지 두 사람을 다 죽였다.'


세설신어 上, 정사政事편 11화.

세설신어 上, 안길환, 명문당, 278p~281p


서진 혜제 처럼 시중을 그리워했던 동진 사마연입니다.


혜제 - "혜시중의 피다. 닦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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